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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교통과 장시 | 2024.06.21 |
1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우리나라 교통망 | 2024.06.14 |
철도개통이전의 교통과지역 |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교통과 장시 | 2024.06.21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2) 교통과 장시 조선 후기의 장시는 전국적으로 1,000여 개 있었는데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당시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등의 자료를 통해 정리해 보았다. (가) 조선 후기 충청도 도로 조선 후기 6로(六路)는 한양~동작나루~과천~수원~천안~공주~여산~삼례역~전주~남원~함양~진주를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인데, 한양에서 보면 경상도로 가는 길 세 개 중에서 오른쪽에 있어 ‘경상우로(慶尙右路)’라 하였다. ![]() ▲ [지도 5]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기)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선 시대 우리나라 충청도에는 율봉도를 비롯해 일신도와 연원도, 성환도, 황강도, 증약도, 시흥도, 금정도, 이인도가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역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죽산과 진천을 거처 율봉도는 율봉역(청주)과 쌍수역(청주), 저산역, 장양역(진천), 태랑역(진천), 시화역, 증약역(曾若驛, 옥천), 가화역(嘉禾驛, 옥천), 토파역(土破驛, 옥천), 순양역(順陽驛), 화인역(化仁驛), 전민역(田民驛), 덕류역, 회동역(영동), 신흥역(新興驛, 황간), 사림역(舍林驛), 원암역(原巖驛) 등 17개 속역을 관할하는 역도로 확립되었다. 근대도시 대전의 이전에는 율봉로의 소역으로 전민(회덕)이 있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표 2] 조선 역로(율봉도) ![]() * 자료 :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 제149권, ‘지리지 충청도’를 보면 충청도에는 다음과 같은 역이 있었다. 율봉도(栗峯道)의 관할 역은 진천의 장양(長楊)과 태랑(台郞), 청주의 쌍수(雙樹)와 저산(猪山), 청안의 시화(時化 또는 時和), 문의의 덕역(德驛 또는 德留驛), 옥천의 증약(增若)과 가화(嘉和), 토파(土坡), 순양(順陽), 화인(化仁), 영동의 회동(會同), 황간의 신흥(新興), 보은의 원암(元巖 또는 原巖)과 함림(含林), 회덕의 전민(田民 또는 貞民) 등 16개 역이다. 일신도(日新道)의 관할은 5개 역이다. 중심역은 역승(驛丞)이 주재하였다. 성종 이후 성환도(成歡道)에 병합되었다. 이에 속하는 역은 경천(敬天, 공주)과 광정(廣程, 공주), 평천(平川, 연산), 단평(丹平, 공주), 유구(維鳩, 공주) 등 5개이다. ![]() ▲ [지도 6] 조선 후기 충청도 지도(출처 : 조선 후기 충청도 지도) http://www.atlaskorea.org/historymap.web/IdxMap.do?method=JR 연원도(連原道)의 역은 충주의 단월(丹月)과 가흥(可興 또는 嘉興), 용안(用安), 괴산의 인산(仁山), 음성의 감원(坎原), 연풍의 신풍(新豊)과 안부(安富), 청풍의 황강(黃江)과 수산(水山 또는 壽山), 안음(安陰), 단양의 장림(長林)과 영천(令泉 또는 靈泉), 영춘의 오사(吾賜), 제천의 천남(泉南) 등 14개 역이다. 성환도(成歡道)의 관할에 속하는 역은 천안의 신은(新恩)과 김제(金蹄), 공주의 광정(廣程)과 단평(丹平), 일신(日新), 경천(敬天), 유구(惟俱 또는 維鳩), 연산의 평천(平川), 연기의 금사(金沙), 청주의 장명(長命), 목천의 연춘(延春 또는 迎春) 등 11개 역이다. 황강도(黃江道)의 관할 역은 청풍의 수산(水山)과 안음(安陰), 단양의 장림(長林)과 영천(令泉), 제천의 천남(泉南), 영춘의 의풍(義豊, 속칭 吾賜) 등 6개 역이다. 증약도(增若道)의 관할 역은 옥천의 가화(嘉和)와 화인(化仁), 토파(土坡), 순양(順陽), 보은의 원암(元岩)과 함림(含林), 영동의 회동(會同), 황간의 신흥(新興), 회덕의 전민(田民) 등 9개 역이다. 시흥도(時興道)의 관할 역은 신창의 창덕(昌德), 예산의 일흥(日興), 덕산의 급천(汲泉), 면천의 순성(順城), 당진의 흥세(興世), 아산의 장시(長時), 평택의 화천역(花川驛) 등 7개 역이다. 뒤에 금정도(金井道)와 병합되었다. 금정도의 관할 역은 대흥의 광시(光時), 결성의 해문(海門), 보령의 청연(靑淵), 홍주의 세천(世川)과 용곡(龍谷), 해미의 몽웅(夢熊), 태안의 하천(下川), 서산의 풍전(豊田) 등 8개 역이었다. 그러나 뒤에 시흥도(時興道)가 금정도에 병합됨에 따라 시흥도에 딸린 8개 역도 이에 소속되었다. 이인도(利仁道)의 관할 역은 9개이다. 용전(龍田)과 은산(銀山), 유양(楡陽), 숙홍(宿鴻), 남전(藍田), 청화(靑化), 두곡(豆谷), 신곡(新谷), 영유(靈楡) 등이다. 분행(分行)과 좌찬(佐贊) 2역(驛)은 경기 찰방도(京畿察訪道)를 관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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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전의 교통과지역 |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우리나라 교통망 | 2024.06.14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1) 우리나라 교통망 교통망에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지형적인 여건이다. 도시는 정치와 경제적인 중심지로서 사람들이 편리하게 거주하고, 이동이 편리한 곳에 자리 잡는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보면 동고서저(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의 지형과 배산임수의 특징으로 큰 도시는 대부분 서쪽에 위치하고 수운과 연관된 곳이 많다. ![]() ▲ [그림 1] 우리나라의 지형(산맥과 강)(출처 : 한국지리교과서) (1) 도로 조선 시대의 도로망을 보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반영하여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였는데, 중국 등 대륙과의 경제적인 교류 등으로 교통망은 기본적으로 남북 종관형의 특징을 보이며, 동서 간의 교통로는 지형적인 여건과 경제적인 교류의 필요성이 적어 지역 간의 상호교류는 발전의 속도가 늦었다. 조선 시대의 도로는 《동국문헌비고》와 《대동지지》에 따르면 10대 간선도로는 한양에서 북쪽으로 2개(1로, 2로), 동쪽으로 2개(3로, 10로), 남쪽으로 4개(4로, 5로, 6로, 7로), 서쪽으로 2개(8로, 9로)가 있었다. 도로별 경유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로(一路)는 한양~고양~파주~평양~정주를 거쳐 국경 의주(義州)에 이르는 길. 2로(二路)는 한양~원산~영흥~함흥을 거쳐 국경 두만강 하구 서수라(西水羅; 우리 땅 산경 장백정간의 종점)에 이른다. 3로(三路)는 한양~원주~동해안 강릉을 거쳐 평해(平海; 현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이르는 소위 관동로(關東路)이다. 4로(四路)는 한양~판교~용인~양지(陽智; 현 용인시 양지면)~광암~달내(達川;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충주로 흘러 남한강에 합수, 3대 명수의 하나)~충주~조령~문경~유곡역(幽谷驛; 문경시 남쪽에 있음)~낙원역~낙동진(洛東鎭; 현 상주시 낙동면)~대구~청도~밀양~황산역을 거쳐 동래(東萊), 부산(釜山)에 이르는 길이다. 5로(五路)는 한양~유곡역은 4로(四路)와 같고, 유곡역~상주~성주~현풍~칠원~함안~진해~고성을 지나 통영(統營)으로 통한다. 6로(六路)는 한양~동작나루~과천~수원~천안~공주~여산~삼례역~전주~남원~함양~진주를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인데, 한양에서 보면 경상도로 가는 길 세 개 중에서 오른쪽에 있어 ‘경상우로(慶尙右路)’라 하였다. 7로(七路)는 한양~삼례역은 6로(六路)와 같고, 삼례역~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을 거쳐 수로로 제주(濟州)에 다다른다. 8로(八路)는 한양~평택~소사를 거쳐 충청수영(忠淸水營; 현 충남 보령시 오창에 있었음)에 이르는 길이다. 9로(九路)는 한양에서 강화(江華)에 연결되며, 10로(十路)는 한양~충주를 지나 안동(安東)과 봉화(奉化)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나라의 도로망은 이처럼 남북이 중심이 되어 동서 지역 간의 이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 지방관이 파견된 목을 보면 [그림 2]와 같은데, 경부 축에는 경주와 안동, 상주, 호남 축에는 전주와 광주, 나주, 충청도에는 충주와 청주, 공주, 경기도 쪽에는 한성과 광주, 여주, 강원도에는 원주, 북쪽으로는 개성과 평양, 정주, 의주, 함흥, 길주 등이었다. ![]() ▲ [그림 2] 조선 시대 도로망(도로 10로,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를 통하여 보면 조선 시대의 경우 남북으로 도로망이 형성되었고, 상대적으로 동서축이 발달하지 못하여 강원도 지역은 원주와 강릉 정도가 그나마 인구가 밀집된 곳이었다. 도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상업이 번성한 지역으로 시전과 사상도고(私商都賈) 등 상인들의 세력이 컸던 고을은 한성과 개성, 평양, 전주, 상주, 대구, 충주, 의주 등 도시인구가 1만~3만 명의 규모였다. 외국무역이 이루어졌던 한성과 부산, 의주, 경성에서 큰 장시가 열렸다. 조선 시대 후기의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는 경기도에 한성과 개성, 강화, 광주, 양주, 충청도에 충주와 공주, 당진, 청주, 부여, 온양, 아산이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광주, 태인, 제주, 경상도는 동래와 밀양, 부산, 진주, 거제, 대구, 상주, 안동, 경주, 의성이었다. 황해도는 해주와 황주 연안이었으며, 평안도는 평양과 의주, 영유, 성천, 선천, 정주, 안주, 창성, 초산, 상원, 철산, 덕산, 가산 등이었다. 함경도는 경성과 길주, 단천, 영천, 함흥, 흥원으로 교통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표 1] 조선 시대의 주요 도시(18세기 후반) ![]() * 자료 : 손정목(1977), 《조선 시대 도시사회연구》, 일지사, p.223. (2) 수운 우리나라에는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큰 강이 많다. 두만강과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의 5대강을 비롯하여 청천강, 예성강, 임진강, 만경강, 영산강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 여건이 좋지 않아 교통은 주로 하천을 이용하였고, 주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암초와 모래섬, 산림의 남벌로 민둥산도 많았다. 수원확보가 어려워 평소에는 고갈되고, 비가 오면 범람하는 예가 많았다. 수운에 관련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고 이 분야의 전문가인 고동환 교수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수운과 관련한 도시는 한강으로는 한성(마포, 용산, 서강)과 춘천, 원주, 충주, 청주, 금강으로는 공주와 강경, 영산강은 영광과 나주, 낙동강은 대구와 진주, 문경, 삼랑진, 대동강은 평양과 남포 등이었다. 당시 수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수운으로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이었다. 조운로를 보면, 이는 해로와 강의 수운을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운의 편의를 고려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한 조선왕조였지만, 처음에는 고려를 계승하여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몇 개의 조창을 설치하고 이를 기점으로 해운에 역점을 두었다. 건국 직후 왜구에 대한 경비책을 강화하여 왜구의 횡포가 점차 제거되면서 각 지방의 세곡을 해운으로 수송하도록 하였다. ![]() ▲ [그림 3] 조선 시대의 조운(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우리나라의 연해안은 다도해로서 항로의 사정이 양호하지 못하였다. 그중에서도 장연의 장산곶(長山串), 태안의 안흥량(安興梁), 강화의 손돌항(孫乭項), 임천의 남당진(南堂津), 영광의 칠산량(七山梁) 등은 항해하기에 험난한 항로였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항해기술도 이와 같은 지형 조건을 쉽게 극복할 만큼 뛰어나지 못하여 난파 좌초되는 일이 많았다. 즉 태조 4년(1395년)의 경상도 조선 16척, 태종 3년(1403년)의 경상도 조선 34척, 태종 14년(1414년)의 전라도 조선 66척, 세조 원년(1455년)의 전라도 조선 55척의 침몰 등 큰 사고가 있었다. 이는 국가 재정상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과 조군의 확보 문제와 아울러 민심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운은 조창의 위치에 따라 몇 개의 해로가 존재하였다. 전라도에는 영광의 법성포(法聖浦), 나주의 영산창(榮山倉), 함열의 덕성창(德成倉)에 조창이 있어 해로를 통해 서울로 운송하였다. 충청도에는 아산의 공진창(貢津倉)과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이 있었는데, 공진창에서는 서해를, 가흥창에서는 남한강을 통해 서울로 연결되었다. 북한강 유역에서는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과 원주의 흥원창(興原倉)이 강원도 조세를 운송하였으며, 황해도 강음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은 해로를, 배천의 금곡포창(金谷浦倉)은 내륙 수운을 이용하였다. 국방상의 요지인 함경도와 평안도는 조세를 해당 지역의 군수 물자로 사용하도록 하여 서울로 운송하지 않았으며, 경상도는 남부 지역의 경우 동래부에서 수납하고, 내륙에 인접한 북부 지역의 일부는 충주 가흥창에 조운을 이용하여 세금을 납부하였다. 압록강은 신의주의 목재, 대동강은 평양의 석탄, 금강은 강경의 미곡 등의 수운 통로로 이용되었다. 20세기 초기인 1915년경의 자료를 통해 본 당시 강의 상황이다. ![]() ▲ [그림 4] 우리나라의 수운(출처 : 고대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http://waks.aks.ac.kr/rsh/dir/rdir.aspx?rshID=AKS-2011-EBZ-3105 두만강 두만강은 백두산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함경북도 북부의 작은 물줄기들을 모아 동북으로 흘러 만주의 간도 지방에서 오는 해란강과 합류하여 동해 쪽으로 들어가는 약 390km의 긴 강으로, 수량은 많으나 강바닥이 거칠어 하구에서 80km 정도인 경원군 근방까지만 소형의 배가 다닐 수 있다. 압록강 압록강은 백두산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북도의 여러 물줄기와 만주 쪽의 여러 물줄기가 합류하여 황해로 들어가는 길이 약 660km로 한반도에서 제일 길다. 하류에는 1,000톤 내외의 기선이 하구에서 안둥(지금의 단둥)을 거쳐 100여 km 상류 창성까지 운행하였다. 모래섬과 암초의 위험은 있지만 작은 배는 혜산진까지 갈 수 있다. 대동강 대동강은 평안남도의 동북쪽에서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대동북강이 평양 동쪽에서 대동남강과 합쳐 평양시가의 동쪽으로 흘러 재령강과 합류하여 폭이 넓어지면서 바다로 흘러간다. 하구에서 겸이포까지는 수천 톤의 기선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50톤 내외의 작은 배들은 평양까지, 그보다 작은 배는 하구에서 약 180km 떨어진 별창(북강) 덕천(남강)까지 운행하고 있다. 한강 한강은 강원도 북부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남부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동북부에서 여러 물줄기가 남한강과 합류하여 경기도의 중앙을 거쳐 서울의 동남쪽을 돌아 서쪽으로 흐르면서 예성강, 임진강과 합류하여 강화만으로 들어가는 반도 중부의 큰 강이다. 강의 길이는 약 390km로 작은 증기선은 용산까지 다니고, 약 150km 상류 북창까지는 50~60석(섬이라고 표현되며 무게는 150~200kg)을 싣는 배가, 춘천까지는 작은 배가 다녔다.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번성한 지역으로는 경강의 용산, 마포, 서강이 있으며, 남한강의 충주, 북한강의 춘천이다. ![]() ▲ [지도 1] 중부지역의 수운(출처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http://waks.aks.ac.kr/rsh/dir/rdir.aspx?rshID=AKS-2011-EBZ-3105 ![]() ▲ 마포 선착장 : 마포는 경성의 서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한강 연안의 포구이다. 철도가 발달할 때까지는 경성을 위한 주요 항구로, 여기까지 배로 운송하여 짐을 운반하였다. 건너편 강가를 왕래하는 나룻배가 다니며, 부근에는 여러 공장이 있다. 낙동강 낙동강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여러 갈래의 물을 합해 경상남북도를 종관하여 남으로 흘러 부산의 서쪽에 이르는 유역 약 430km의 남한 최대의 강이다.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권역으로 하고 있으며, 수량이 많을 때는 안동까지 배가 다녔고 평시에도 낙동 이하도 배가 다녔다.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 경상도 지역 대부분의 화물 수송은 낙동강 수운에 의존하였다. 낙동강 본류의 중요한 포구들은 하단과 구포, 삼랑진, 수산, 남지, 현풍, 왜관, 낙동, 풍산, 안동 등이었다. 아울러 대구도 낙동강 나루터인 사문진에서 12km 떨어진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수운 수송에 큰 영향을 받았다.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도 낙동강 수운은 구포와 하단으로 연결되어 경부선 철도를 통해 전국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 ▲ [지도 2] 남부지방의 수운(출처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http://waks.aks.ac.kr/rsh/dir/rdir.aspx?rshID=AKS-2011-EBZ-3105 기타 금강은 하구에서 약 44km의 강경까지 소형 증기선이 다니고, 작은 배는 하구에서 135km 떨어진 부강까지 운행하였다. 영산강은 하구 목포에서 85km의 방하동까지 운항하였으며, 목포~영산포 간은 소형 증기선이 왕래하였다. 이들 강은 매년 겨울철에는 최장 11월부터 3월까지, 최단 12월부터 2월까지 강물의 결빙으로 운행이 불가하였다. ![]() ▲ [지도 3] 금강과 대전의 회덕 금강의 수운은 군산에서 출발하여 부강까지 연결되었으며, 주요 포구로는 웅포와 입포, 강경, 규암리, 공주, 논산 등이 있다. 강경은 수운과 연결된 수송이 많았으며 1902년 소형 증기선이 강경과 군산 간 운항을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과 강경 간의 증기선이 군산보다 앞서 운항하였다. 1912년 기록을 보면 당시 수운으로 강경에서 금강을 통해 석성까지 1시간, 규암리 3시간, 부여까지 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1927년에는 빠른 배를 투입하여 강경에서 오전 9시와 오후 6시 출항하여 부여까지 소요 시간이 1시간으로 단축되었으며, 운임은 편도 95전(현재 가격 약 9,000원)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강경은 1912년 은진군 김포면(전북 여산군 북일면 일부 편입), 1914년 3월 1일 논산군 강경면으로 개정되었다. 이후 1915년 전북 익산군 망성면 작촌리를 일부 병합하였으며. 1931년 4월 1일 강경읍으로 승격하였다. ![]() ▲ [지도 4] 금강의 뱃길과 교통로(출처 : 매일신보 1931. 8. 2.) 당시 전성기 강경은 포구의 하역을 돕는 노동조합원의 수가 만 1명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경의 번성을 알 수 있는 것이 법원과 경찰서, 세무서 등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의 수운을 통해 많은 물건을 수송했기 때문에 은행도 번성하였다. 근대기에 한호농공은행지점, 한일은행지점, 삼남식산주식회사, 강경신탁주식회사 등 7개의 금융기관이 있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역 주변에도 2개의 여관이 있었고 숙박료는 특등 5원, 1등 4원, 3등 3원의 요금을 받았다. 번성했던 강경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도 개통으로 금강 상류의 강경 상권에 포함되었던 지역이 상권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강경은 호남고속도로 노선에 포함되지 않았고, 한때 철마다 생선과 쌀 운반선으로 100척 이상 들어왔던 배도 상류의 토사로 결국 수운이 중지되었다. 영산강은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0km 구간에 선박이 운항하였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까지 올라간 배는 큰 배는 아니었고 조그만 나룻배(江船)였다. 조선 시대 영산포 상류의 수심은 1m 내외였지만 곳곳에 수심이 60cm도 못 미치는 곳이 많았다. 영산포의 상류는 해선이 항행하기는 불가능했고, 나룻배만이 다닐 수 있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범선은 영산포에서 2.4km 상류에 있었던 노항포(路項浦)까지만 항행할 수 있었다. 영산포에서 목포까지는 영산강의 중·하류 지역이다. 이 구역에는 수많은 여울이 산재해 있어 선박이 항해하려면 밀물을 기다려야만 했다.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항해시간은 선박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 증기선의 경우, 소강에는 4시간 반, 하강에는 3시간, 돛단배의 경우 소강에 18시간, 하강에 12시간이 소요되었다. 철도는 이보다 훨씬 빨라 2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영산강 수운은 호남선 철도 개통 이후에도 철도교통에서 소외된 지역의 교통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생명력을 이어갔다. 영산강 유역의 장시망은 일반 군현처럼 군현의 읍치에서 열리는 읍내장을 중심으로 주변 농촌 지역의 소규모 장시를 연결하는 장시망과 영산강 수운을 기초로 한 광역의 장시망의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 ▲ 영산강의 수운(출처 : 전남 100주년 사진집 인용) 읍내를 중심으로 한 장시망이 지역 내부의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영산강 수로를 통한 장시망은 영산강 유역을 넘어서서 다른 지역으로 연결하는 지역 간 네트워크였다. 영산강 유역에서 생산된 농업생산물은 읍내 중심의 장시망에서 집산된 후, 영산강 수로의 장시망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었다.(참고 1) 이들 강은 매년 겨울철에는 최장 11월부터 3월까지, 최단 12월부터 2월까지는 강물의 결빙으로 운항할 수 없었다. 1920년대 후반, 목포항에 일본으로 갈 쌀을 실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 쌀들은 영암과 나주 들녘에서 영산강을 통해 운반되었다.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1980년대 초반 하구언 건설에 따른 지형과 지물의 변화이다. 1908년 한 달 평균 배편을 이용해 목포에서 영산포를 오간 사람 수는 1,212명이었다. 이 중에서 한국인이 60%였고, 일본인이 40%를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목포~영산포 간 뱃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영산포에서 목포까지 철도 운행시간은 두 시간에 불과해 이용객이 폭증하고 항로 이용은 급감했다. 우리나라 수운은 한반도 깊숙한 곳까지 물길로 연결될 수 있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교통의 중심은 수운이었다. 이러한 수운의 우월성으로 육상운송에서 수레의 사용에도 제한이 있었다. 이처럼 수운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의 해금 정책을 계승하여 대양 항해가 금지되어 국내 연안 항해만이 유지되었다. 근대 교통망으로 철도가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 교통망은 수운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였다. ============================================== 참고 1) 고동환(2011), ‘조선 후기~한말 영산강 수운과 시장’, 도서문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pp.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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