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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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창시시대의 철도운영 | 2021.06.14 |
8 | 철도 개통에 의한 영향 | 2021.06.09 |
7 | 군용철도 경의·마산선의 건설과 경원선의 기공 | 2021.05.31 |
6 | 경부철도의 건설 | 2021.05.24 |
5 | 경부철도주식회사 | 2021.05.17 |
철도의 창시 | |
창시시대의 철도운영 | 2021.06.14 |
창시시대의 철도운영 경인철도 경인철도는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 간에 가영업을 개시했으며, 1900년 6월 말 한강 교량이 준공되어 7월 8일부터 인천~경성(서대문) 간 약 26.3마일(42km) 구간에서 운수 영업을 개시했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철도 영업의 첫 걸음이었다. 개업 당초의 열차는 인천~노량진 간을 오전, 오후에 각각 1회 왕복운행을 했는데, 경인간 전체 노선이 개통됨과 동시에 1일 5회를 왕복하게 되었다. 당시의 운행 속도는 30~40km/h였다. 차량은 모갈형(2-6-0) 포화 증기기관차를 시작으로, 목제 여객차, 화물차와 함께 미국 수입차량으로 중앙 완충기를 채용하고 있었다. 여객운임은 1마일 1인당, 3등 1전5리 2등 3전(3등의2배) 1등 5전6리(3등의3.75배) 였으며, 경성~인천간27마일(43.5km) 구간에서는, 3등 40전 2등 80전 1등 1엔50전 이었다. 화물은 근 취급 임률을 규정하여 147종의 종목을 지정하였으며, 각 화물의 품종에 따라 1개 또는 1개의 최고 근량을 50근 내지 400근까지의 여러 단계로 구분하고, 이에 대해 운송 요금과 상관없이 단일 임률을 부여했다. 거리비례를 채용하지 않은 이유는 전적으로 경성~인천 간의 화물 운임을 기준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임은 1905년 1월 1일 경부철도의 영업개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영업개시 당시에는 노량진 임시역에서 경성에 이르는 구간의 교통 불편과 한강의 배를 이용한 오랜 관습으로 철도를 이용하는 이가 적었지만, 겨울철 결빙 및 홍수로 인한 수운의 중지 등으로 철도의 편의성을 알게 된 후부터는 큰 화물을 제외한 대부분이 사계절 내내 철도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 후 흉작으로 인해 불황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철도의 여객과 화물은 점진적인 증가 경향을 보였으며, 실적이 뚜렷하게 향상되었다. 그 후 1903년 11월 1일 경부철도주식회사에 매수되어 1906년 국유가 될 때까지의 하루 1마일 평균 수입은 다음과 같이 상당히 양호했다. 1900년상반기 7.39엔(하반기16.03엔) 1901년 20.51엔 1902년 21.77엔 1903년상반기 24.91엔(하반기31.42엔) 1904년 48.00엔 1905년 40.42엔 1906년상반기 45.04엔 영업수지 비율은 영업 당시 76%였으나, 그 후 점차 양호해져 경부철도와 합병 당시의 영업 지출은 대부분 수입의 절반 수준이었다. 경부철도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각 구간의 부분적 개통에 따라, 운송 규정을 두고 유임 또는 무임으로 여객 및 화물을 취급했는데, 1904년 9월에 이르러 전 노선 개업이 예상되어, 10월 총무부를 도쿄에, 영업부를 부산에 설치했다. 예정대로 다음해 1905년 1월 1일부터 초량~영등포 간 268마일(431km)의 운수영업을 개시함과 동시에 종래의 경인선 운임요금제를 폐지하였고, 경부선, 경인선에 시행하는 통일적인 여객, 화물, 수하물의 취급 및 운임 요금을 정했다. 당시 여객운임은 원거리일수록 감해주는 방법을 채택했다. 3등(50마일까지) 1전8리/1마일 3등(50~100마일까지) 1전6리/1마일 3등(101마일이상) 1전4리/1마일 2등 3등의2배 1등 3등의3배 로정했다. 화물은 통상급(근급), 대화물급(톤급), 동물 및 속달편급(근급)의 4종류로 나누고, 통상 화물 100근은 거리(1마일)당 1리 내지 9리, 대화물 1톤은 거리(1마일)당 1전 내지 5전, 동물(소·말) 1마리는 거리(1마일)당 2전 내지 10전, 속달화물은 100근당 40전 내지 1엔 20전의 범위 내에서 각각 그 임률을 정했으나, 화물임률은 대략의 표준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므로, 화물 개당 적당한 할인을 하여 임률의 조화를 꾀했다. 열차운행 상황 당시 제정된 운행 및 신호 규정에 의해 서대문~초량 간 남행 및 북행 2대의열차를 운행하였고, 북행은 초량을 오전및오후에 출발하여 대전 또는 대구까지 운행하고, 다음날 서대문에 도착했다. 남행은 대전 또는 대구를 거쳐 다음날 초량에 도착하여 편도 약 30시간을 요했는데, 이는 일부 가선 외 야간 운행에 위험 구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선로 개량에 따라 같은 해 5월 운행 시각을 개정하여 1일 1회 직통열차로 경부간을 14시간에 주행했다. 1905년 9월부터는 산요철도가 러일 전역 귀환부대 수송의 일단락으로 인해 열차 및 연락선의 운항 시각을 개정했기 때문에, 경부선도 1906년 4월 16일부터 최고속도로 초량~서대문 간을 11시간에 운행하는 급행열차가 출현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오사카 간 48시간(2박)을 요했던 것이 40시간으로 단축되었고, 각 1회 왕복하는 복합 열차가 운행되어 경부 간 교통상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당시 경부선의 역 수는 47개 역으로, 그 중 역원배치역은 27개역에 불과하며, 선로를 따라 주변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은 매년 거래가 증가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부 간 직통 급행열차 창설 이후는 점차 철도의 편의성을 인식하여 여객과 화물의 이용도 점차 증가해 갔다. 영업 성적은 영업이 시작된 1905년 7월, 남한방면으로 수해가 발생하여 선로가 복구된 것은 12월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업부진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 후 1906년에 이르러 더욱 운행 시간을 단축하여 간선으로서의 기능을 한 단계 높여 업적도 호황을 향해갔다. 1일 1마일당 평균수입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상반기 9.14엔 / 하반기 9.89엔 1906년 14.00엔 회사는 한일교통의 편리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1905년 9월 11일부터 도카이도 본선(東海道本線), 산요선(山陽線, 관부 연락선을 포함) 및 규슈선(九州線)과 연대운송(공동운송)을 개시하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 10일부터 철도감부 소속의 용산~평양 간도 연대운송을 개시하여 경의선 열차를 용산을 거쳐 남대문까지 직통으로 운행하고, 12월 1일부터는 연대 취급 구간을 신의주까지 확장시켰다. 경의 및 마산선 임시군용철도감부는 1905년 3월 용산~신안주 구간을 개통한 후, 운행 사무 취급역 및 1회 왕복 열차를 지정하고, 건축과 보선공사에 지장을 주지 않고 열차에 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승차증을 지참한 군사 공용자 또는 감부의 중요 업무 담당자를 우선적으로 탑승시키고 그 외의 공용자, 관공사 및 감부사업에 관계가 있는 자를 탑승시켰다. 1905년 10월 중순, 군용철도 운수규정 외의 규칙을 정해, 11월 1일부터 용산~개성 간, 용산~평양 간 및 황주~겸이포 간에 각 1회 왕복의 혼합열차를 운행하였고, 유임 운송 취급을 개시했다. 이것이 본선의 최초 유임운수였다. 운송에 요하는 임금은 거리 비례법에 의해, - 여객 3등 3전/1마일 2등 2배 1등 3배 - 화물 근급 100근 5리/1마일 톤급 1톤 5전/1마일 로하였다. 1905년 12월 1일에 이르러 평양~신의주 간에 유임 운송 정책을 추진하여, 청천강, 대령강의 두 교량 완성에 이르기까지 두 강의 도하에는 작은 증기선을 이용해 연락 운항시켰다. 그리고 다음해 1906년 4월 3일부터 추가로 용산~신의주 328마일(528km) 간의 취급역을 증가하여 부정기 화물열차 1회 왕복을 늘리고, 같은 해 3월 1일 용산~평양 간의 여객 열차 1회 왕복을 늘려 출발시켰으며, 3월 25일 청천~대령 두 강의 교량 완성과 함께 열차 시각을 개정하여 직통 운행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열차의 운행 횟수를 증가시켜 수송력의 충실을 기함과 함께 경부철도와의 연락 완성으로 군사요구에 응하는 한편, 일반인의 이용에도 부응하였다. 그 후 통감부에 이관되었는데, 유임 운송 취급을 개시한 1905년 11월부터 통일기 전, 즉 1906년 8월까지 10개월 동안의 운수 성적은 수입 개략 약 58만 엔에 달하였고, 하루에 거리 1마일당 평균 수입은 6엔 8전에 이르렀다. 그동안 군수품 2만 4천 톤, 건축재료 10만 6천 톤을 수송하였고, 철도 초기의 수입으로는 대단히 우량한 성적을 거두었다. 마산선은 1905년 11월 11일부터 일반 여객 화물의 유임 운송을 개시하였고, 마산~삼랑진간에하루2회왕복열차를운행하였으며, 여객운임은 3등만으로 1마일당 3전을 징수했다. 다음해 2월 11일 거리 1마일당 1전 8리로 가격을 낮추었고, 3등 운임의 2배 운임으로 2등 여객 취급을 개시하였으나, 2월 22일 2, 3등 객차 1량의 소실로 인해 2등을 폐지했다. 운송 개시일로부터 1906년 8월에 이르는 운수 총수입은 약 2만 9천 엔이었으며, 하루 평균 거리 1마일당 수입은 여객 2엔 76전, 화물 31전, 합계 3엔 7전이었다. 창시시대의 차량 [경인철도] 1899년 한반도에 최초로 큰 기적소리를 울리며 철로를 달린 증기기관차는 미국 브룩스(Brooks)사가 제작한 모갈(Mogul)형 탱크기관차였다. 영국에서 스톡턴~달링턴 간에 세계 최초의 영업용 열차가 탄생한 것이 1825년이고, 일본의 신바시~요코하마 간의 개통이 1872년이었던 것에 비해, 조선철도는 세계 각국 철도 가운데 47번째로 창시되었을 만큼 역사는 짧았다. 경인철도는 미국에서 수입한 표준궤간(1,435mm)용 차량을 인천공장에서 조립하였다. 당시 일본은 차량 제작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외국의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인천공장에서 계속 수입품을 조립하였다. 기관차 4량(모갈형탱크(2-6-0)) 객차 12량(목제) 합조차(좌석 및 식당과 같이 2종 이내의 차내 설비를 1개 차량에 병설하는 여객차) 4량(목제) 화차 36량(목제) 이 밖에도 한국 황제용으로 일본에 1량 발주하여 황제용 차량으로 사용했는데, 이 황제용 차량은 일본이 외국에 수출한 차량 제1호로 기념할 만한 것이었다. [경부철도] 군용철도의 목적으로 서둘러 건설된 경부철도는 가선의 경사선이 많았기 때문에, 프레리 탱크기관차를 주로 미국 볼드윈 회사로부터 수입하여 인천 또는 초량공장에서 조립하였다. (아래 표 참조) 객차는 보기 관통식, 길이 50피트(15m), 폭 9피트 7인치(약 3m), 중량 55,000파운드(25kg)를표준차(하3형)로 했으며, 87량이 수입되었다. 화차는 길이 34피트(10m), 폭 8피트(2.4m), 하중 60,000파운드(27kg)를 표준치로 하여 당초 미국에서 수입했는데, 나중에는 일본의 기차제조회사 제품을 초량 및 인천공장에서 조립하여 273량이 정비되었다. 차량은 일반적으로 중앙 연결 완충기가 이용되었고, 공기 제동장치가 일부에 이용되었다. 화차는 하중 27톤을 표준으로 하였다. [임시군용철도] 경의선, 마산선, 경원선의 속성공사건설이 진행되었다. 미국에서 수입한 기관차의 조립을 위해 겸이포에 공장을 설립하고, 인천에도 소규모 공장을 마련했다. 기관차는 미국 볼드윈(Baldwin) 회사 제품이며, 객차는 미국 카 앤드 파운드리(American Car and Foundry) 회사의 목조차량(하3형)이다. (아래 표 참조) 기타 주방이 있는 1, 2등 차량 외 68량, 임대 차량은 유개차 30량, 무개차 290량이 정비되었다. 객차는 목조차로 증기난방, 공기제동기, 유등 장치를 갖추고, 4륜 보기 차량으로 중량은 20톤 내지 23톤이었으며, 정원은 2등 차량이 78명, 3등 차량이 104명이었다. 유개화차는 목제 틀로 중량 12톤, 하중 22톤이었으며, 무개화차도 제동기가 장착되었다. 이상의 차량은 러시아 차량을 개조했던 소형 객차를 제외한 미국 수입제인데, 제작을 서두른 관계로 대체적으로 조잡한 제품이 많아 물의를 일으켰다. 창시시대의 철도공장 [인천공장] 1899년 경인철도가 철도건설공사를 시행하게 되어 기관차, 객화차 조립 및 수리를 하기 위해 인천공장을 설치했는데, 이는 한국의 철도공장의 시조라 할수있다. 단야, 선반, 도공, 목공, 조립등의시설을정비했는데, 1897년 이래 모스가 준비한 기계의 대부분을 인계받았다. 기계설비로는, 보일러 20HP 1기 스팀해머 1/2톤 1대 호일하이드릭프레셔 1대 스크류잉그심 1대 너트타핑 1대 다이닝게이지 1대 등으로 조립공장에 불과했다. 당시는 차량 기술이 미숙하였기 때문에 수입 조립주의를 계승하여 인천공장의 충실을 꾀했다. 그 후 1905년 6월에 경부철도에 이어 1908년 4월 통감부 철도국 용산공장으로 통합되어 폐쇄되었다. [초량공장] 경부철도는 경인철도 합병 전부터 경인철도의 인천공장을 이용해 왔으나, 1904년 4월 교량 조립과 객화차 수리를 위해 북부방면은 영등포에 소규모 공장을 설치했으며, 남부방면은 1904년 2월 초량에 기계공장을 설치하고 교량 및 차량을 조립했다. 이 공장은 점차 시설을 확충, 1906년 통감부 철도국 공장에 인계되어 초량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기계공장·목공장(벽돌건축) 외, 대장공장·증기보일러실을 가졌다. 포터블엔진 18HP 2대 세미포터블엔진 1대 수관식보일러 120HP 1대 공작기계 21조 초량공장에서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기관차 조립 수는 1901년에서 1906년까지 36량에 달했다. 목제유개화차는1907년에100량, 1910년에50량을새로만들었다. [용산공장] 1905년 6월 임시군용철도감부가 차량 수리를 위해 용산공장반을 설치하고, 1906년 통감부 철도관리국 이관과 함께 용산공장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에 포터블 엔진(10HP) 1대 및 공작기계 19조를 설비하였고, 기관차 수선을 실시했다. 다음해 1907년도에 재래의 조립, 선반, 마무리 및 목공의 각 현장을 일부 증축하였고, 보일러제작, 주물의 현장을 신축함과 함께 용선로(cupola) 1조를 신설하여 주물 작업을 실시했다. 1908년에 인천공장의 시설을 인수하여 규모를 확대하였고, 1909년에 객차 수선 공장이 완공되었다. 1910년에는 유개화차 100량을 제작했다. [겸이포공장] 1904년에 경의·마산 두 선로의 건설에 임한 임시군용감부는 겸이포공장반 및 인천분견소를 설치하고, 경의선 건설에 필요한 기구 제작 및 윤전재료, 교행 등의 조립 수리를 실시했다. 당시 겸이포가 공장 설치지로 선정된 이유는 경의선 건설 자재의 상륙지로 설치된 10개소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자재 조달이 편리한데다, 항구가 있어 바다와 육지 사이의 연락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공장은 당초 가건축 약 150평에 보일러와 주물 공장이 있어, 기관차와 객화차 조립 및 수리를 담당했다. 1911년 11월에 평양공장으로 인계된 후 폐쇄되었다. 1904년부터 1906년까지의 차량 조립 대수는, 탱크기관차 52량 텐더기관차 2량 객차 68량 유개화차 30량 무개화차 290량 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소형 객차를 제외하고 모두 미국에서 수입된 차량이다. (아래 표 참조) 1910년 겸이포공장의 차량 수선표 공장 종업원은 기공(공작방이라고도 함)이라고 불렸으며, 1906년 각 공장의 인원은 다음과 같다. 초량공장 260명 용산공장 156명 인천공장 137명 겸이포공장 219명 (합계 772명) 러일전쟁과 당시의 철도 운영 한국은 청일, 러일의 두 전쟁에 있어 일본의 작전상 중요한 거점이 되었지만, 러시아 개전 당시의 철도는 경인선만 있었으며, 경부선은 1904년 7월까지, 북방은 경성~부강 간 약 130km를, 남방에서는 부산~대구 간 약 124km를 건설하여 열차를 운행하고 있던 상태에서 당시 일본군 제1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에서 승리하고, 마천령 고개를 넘어 요양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의선은 개전 직후 건설에 착수되어 전쟁 중에 열심히 공사를 서둘러 1905년 1월 14일에는 267.5km를 준공, 용산에서 평양까지, 1월 26일에는 신안주까지 71km의 공사를 완성했다. 더욱이 여러 곳에 교량을 남기고 164.3km를 북상하여, 신의주에 도착한 것은 동해 전쟁에 앞서는 1개월 전인 4월 28일이었다. 경인선은 제12사단의 인천 상륙 후 서울까지의 운송에 사용되었는데, 경부·경의 두철도의 건설상황은 앞서설명한 바와같았기 때문에, 직접 군사 수송에 사용된 것은 경의철도의 일부 준공 구간에서의 군수품 수송뿐이었다. 이를 위해 해상 병참선의 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일본 해군은 종종 적함대의 공격 및 항구의 폐쇄를 감행하였고, 개전 후 얼마 되지 않아 황해의 제해권을 일본이 확보하여 전국의 대세를 결정적으로 장악했다. 과거 일본군의 상륙지점은 당초 황해연안의 인천에 요구했지만, 군의 북진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남포, 의주, 중국 안동으로 옮겨졌다. 그러면서도 서울~의주 간의 육로 도보에 의한 대부대의 작전 행군 및 병참선의 북상은 험악한 기후와 열악한 도로 상태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어려움을 맞이했으나, 그 고통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많은 시간을 소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병참은 육로 수송을 보조로 하였으며, 대다수는 해로 수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함경도 방면 부대의 병참은 해로 수송을 보조하였으며, 전쟁 후기에는 주로 육로 수송에 의해 청진~창평 간에 경편철도를 부설하여 수송을 보충했다. 요컨대 경부, 경의 및 마산의 각 철도는 러일전쟁에 있어 군사 수송을 목적으로 급설된 것이지만, 그 준공은 평화를 위한 것이며, 또한 전선이 멀리 북상했기 때문에 전시 중에는 직접 병력동원 및 군수품의 수송에 이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철도의 건설은 그 후 한국 국내의 개발은 물론이거니와, 전쟁을 계기로 일대 전환을 보인 일본의 대륙 경영상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또한 충실한 국방태세 구축에 큰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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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창시 | |
철도 개통에 의한 영향 | 2021.06.09 |
철도 개통에 의한 영향 철도 출현 이전의 내륙 교통 철도가 출현하기 이전 조선의 교통은 1876년 일본이 조선과 체결한 수교조약에 기초하여, 일본의 우편 조령에 의해 우편 취급소를 중요한 곳에 설치하여 우편을 개시하였다. 이후 1884년에는 전신까지 취급을 하게 되나, 일반 교통은 매우 미흡한 상태에 있었다. 조선 정부의 시설로는 도로의 구축에 관한 과역법, 통신에 관한 우편규칙과 그에 따른 우편사 등이 있었으며, 민간에는 들것·짐말·가마 등을 이용하는 자유노동자, 매우 영세한 강(江) 운송업자 및 여객 화물은 중계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객주 등이 있었다. 그러나 교통 수요가 적어 교통이 매우 황폐한 상황이었다. 도로는 과역법에 의해 민간 비용으로 구축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법이 되어버려 파괴가 되어도 그대로 방치되었다. 주요 간선 가도조차 인마로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으며, 하천에는 교량이 설치되지 않아 도보나 배로 건너 다녔다. 더욱이 우기에는 하천이 범람하여 교통이 자주 두절되는 상태였다. 도로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행은 도보·가마 또는 짐말에, 화물의 운송도 들것·짐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역참의 뒤를 이어 생겨난 우편사의 우송(郵送)도 짐말이나 보행을 이용했다. 가마는 장거리의 빠른 여행에 적합하지 않으며, 여러 명의 인부가 필요하기 때문에 임금이 비싸 일부 부유계급자만이 이용하였다. 짐말은 장거리 여행이 가능하여 어느 지역에서나 요구되었으며, 임금도 가마보다 싸고 편리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다. 화물 운송은 소량의 단거리일 경우 대부분 들것을 이용하였으며, 대량의 원거리일 경우에는 짐말을 이용했다. 그러나 짐말이 운반할 수 있는 양도 약 쌀 8가마 또는 석유 3통 정도였고, 장거리 운송의 경우 짐말 업자를 신용하기 힘든데다 연대제(連帶制)도 도입되지 않은 상태여서 반드시 보조인이 필요하다보니 운송 실비가 비싸져서 사실상 대량 화물의 원거리 운송은 거의 불가능했다. 도로 교통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하천운송은 내륙 교통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압록강과 청천강, 금강, 낙동강 등은 그 중류 이하에서 모두 봉선(조선 고유의 범선) 또는 일본 선박을 이용했다. 하천의 상태에 따라 운송 범위가 자주 바뀌었으며, 선박의 구조가 매우 조잡하고 왜소하여 운항에 어려움이 따랐으나, 육로운송에 비해 수송력이 훨씬 뛰어나고 임금도 저렴하여 여객과 화물이 모두 하천운송에 집중되었다. 특히 화물 운송에 많이 쓰였다. 철도 개통에 의한 일반적 영향 조선의 교통은 도로상의 차량시대를 경험하지 않고 바로 가장 효율적인 교통기관인 철도의 출현을 맞이했다. 이는 교통 발달의 일반적인 과정에 나타난 비약적인 사건으로, 교통 및 경제에 직접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더욱이 철도의 운영에 일본의 자본과 인적 요소가 투입되었다는 점과 정치·군사·사회 등에 매우 큰 영향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그 인문적 의의가 매우 크다. 즉, 중세 교통수단에 의존하여 분립적·간헐적으로 이루어진 하천운송 중심의 교통이 전 국토를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의 출현으로 인해 상호 연대를 확고히 하면서 간선 철도를 축으로 하는 일대 교통으로 통합되었다. 그 결과 기존의 교통수단은 없어지거나 축소되었으며, 철도와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인 것만이 간신히 옛 모습을 유지했다. 교통 지리의 대변혁으로 인해, 기존의 산업도 국소적인 지방 자급자족 형태에서 탈피하여 확대된 시장을 겨냥한 지방 특산품의 증대로 이어졌다. 교통 지리적 요소에 새로운 산업을 기획·도입함으로써 인구의 집중화 경향도 나타났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 철도 부설의 영향으로 기존의 요충지를 대신하여 새로운 경제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하면서 향후 번영할 조짐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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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창시 | |
군용철도 경의·마산선의 건설과 경원선의 기공 | 2021.05.31 |
군용철도 경의·마산선의 건설과 경원선의 기공 임시군용철도감부의 편성과 작업 개요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 아래 대군이 북진하는 데 있어 군수품 수송을 위해 경부철도의 속성 건설과 함께 서울~압록강 간 의주가도에 급속한 군용철도 부설이 필요하게 되어, 병참 총감 직속 아래 임시군용철도감부의 편성을 지시받게 된 것은 1904년 2월 21일이었다. 동시에 철도감 야마네(山根) 소장 이하의 직원을 임명하고 철도대대 및 공병 5개 대대를 그 지휘 아래 두어 3월 4일 인천에 상륙, 5일 서울에 도착하여 각 부서를 정하고 즉시 공사 준비에 착수하였다. 또 공병 제6대대도 같은 달 하순 개성에 도착하였다. 감부는 1904년 3월 14일 한국 주둔군 사령관 아래로 옮겨졌으나 6월 1일 병참 감부와의 연락 및 작업 기점 벽란도(현 토성역 부근의 예성강 해안) 및 철도(현 겸이포 부근)와 수로 교통이 편리하므로 이를 인천으로 이전하고, 재료 배급계를 용산에 남겼다. 8월 9일 편성 개정과 함께 다시 병참 총감의 직속으로 돌아가 8월 14일 마산선의 부설 결정과 함께 상장관 이하 31명의 부원을 증원하여 마산포철도건축반을 설치하고 그 건설에 임하게 하였으나, 1905년 4월 13일 이를 마산포철도반으로 개칭하였다. 감부는 상륙 이래 전국에 유리하도록 공사를 서둘렀으나, 경의선의 공사가 반 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공병 제4대대는 소속 사단에 복귀하여 요동으로 이동하고, 이에 대하여 제1, 제2, 제12사단의 보조병이 공사에 임하고, 그 뒤 공병 제6대대 및 철도대대의 2개 중대, 전기 각 사단의 후비 공병 중대도 또 각 방면으로 이동하는 등, 부대의 교대 출입이 빈번하여 공사 계획이 조금씩 변경되고 작업 진행에 지장이 있었다. 그러나 견실하면서 신속한 군대의 작업은 공사를 빠르게 진척시켰다. 경의선의 속성 경의선의 선로 선정에 대해서는 전시 긴급 때문에, 엄밀한 조사를 실시할 틈도 없어 5만분의 1 지도에 의해 도상 설계의 방법을 취하고 후일 실측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1904년 2월 27일 대본영의 내령에 의해 인천에 상륙한 철도 기사 이시카와 고쿠다이(石川石代), 가토 이사무(加藤勇) 및 사관 이하 30여 명의 측량반은 우선 용산~개성 사이의 측량을 4월 11일 종료, 개성~평양 간 및 평양~순안 간은 4월 4일 도착한 별동대의 철도 기사 가토 이사무이하 35명의 측량원에, 인천 이외의 중간 상륙지의 설정을 제1 목적으로 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철도 감부원 공병 소좌 와타나베 겐지(渡兼二) 등 22명의 측량원이 더해져 5월 중순 이를 종료하였다. 당시 야전군은 멀리 요동반도로 나아가 병참선은 점점 증대되는 정세였으며, 동절기의 북동 항만의 동결 때에 후방 연락을 확보해야 하는 필요상, 반도 종단 철도의 완성뿐만 아니라 나아가 동청 철도에 연락을 긴급히 하는 한편, 경부철도 속성공사 완성의 시기도 가까웠으므로, 감부는 우기에 들어가기 전에 본선의 측량을 완료하려 5월 하순, 순안 이북 압록강 좌안 사이의 실측에 착수하였다. 압록강 교량 지점에 대해서는 공병 대위 야마고에 도미사부로(山越富三郞)가 의주 및 대안의 지세 조사 후 가교 지점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경의 전 노선의 연장을 결정하였으나, 같은 해 4월 이시카와 고쿠다이 기사는 측량반에 대하여 다음의 기술상의 규정 및 주의를 내렸다. (1) 선로 선정은 구배 100분의 1, 곡선 반경 20쇄를 한도로 해야 하지만 급속 개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최초 구배 40분의 1(할 수 없으면 30분의 1, 곡선 반경 10쇄)을 한도로 한다. (2) 시공기면 폭은 15척으로 하고, 축장은 높이 15척 이상은 5척이 늘어날 때 기면 폭 1척을 증가시키고, 좌우 경사는 1할 5푼을 표준으로 한다. (3) 정거장 용지는 길이 800척, 폭은 300척으로 한다. 단 기관차고 등을 설치한 것은 적절하게 증가를 필요로 한다. 이 철도 용지는 1904년 2월 체결된 한일 의정서의 정신에 근거하여,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하게 하는 명문에 따라 감부로부터 한국 정부에 청구하게 되었으나, 군사적 및전후경영의 입장등으로 그절차를 진행하여 사유지의 대금 및 가옥, 분묘 등의 이전비는 일본 정부가 지불하였다. 재료 수송 지선의 특설 경의선 건설에 있어 서해안 각 지점에 기점을 설치하고 다수의 재료 수송선을 부설하였는데, 이는 본 철도공사상 특이한 점이었다. 상륙지점으로서 공사 착수 당초부터 이용된 것은 마포(용산 부근) 및 인천이었는데, 인천은 내항의 수심이 얕아 각종 불편이 있었으므로, 응급책으로 총 공비 27만 엔으로 소월미도 남면을 매립하여 가상륙장 및 재료 적치장을 설치, 월미도~인천역 간에 전 길이 2,700척의 월미도 교량 및 재료 운반용 철도 지선 3km여를 설치하여 1906년 8월에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후일의 월미도 개발의 시초였다. 또 대동강에 상륙장을 설비하고 만주로 통하는 지선을 부설하게 되어, 당시 인천에 상륙할 예정이었던 설비 공병 4개 중대 중 1중대 및 부원 공병 소좌 와타나베 겐지, 철도 기사 가토 이사무 이하 22명의 측량반을 급히 철도로 보내었다. 그러나 적당한 재료 상륙지점을 찾는 데 고심하였는데, 와타나베 소좌는 청일전쟁 당시 제5사단 주력이 도하했던 한 지점을 선정하고, 이어 황주~겸이포 사이의 지선을 부설하였다(겸이포라는 지명은 야마네 철도감이 와타나베 겐지 소좌의 공을 기려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외 황해 연안에 벽란도, 신안주 및 다른 6곳의 재료 운송 지선을 부설하였는데, 그 중 1선만을 경편철도로 하고 다른 것은 모두 표준궤간으로 하였다. 간선의 공사 완성 후 그 대부분은 폐선되었는데, 겸이포 지선, 마포 지선, 신안주 양륙장 지선 등은 그대로 존치되었다. 공사 재료 중 구하기 쉬운 것은 현지 조달을 계획하였으나, 민간 인력이 피폐하여 공업이 부흥하기 어려운데다 산이 이어지는 연선에서는 이를 얻기가 어려워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한 탓에 육로수송이 힘들어 공사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만주 진출 후에는 압록강변의 자재를 다수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재료 수요를 충당하여 사업의 진행 상 큰 편익을 얻었다. 경의선의 건설 완공 이 철도는 용산~개성 구간의 건설에 우선 착수되었으며, 이어서 개성~평양 및 평양~신의주 구간의 공사가 추진되었다. 공사는 당초부터 조기 완공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측량과 건설공사의 착수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재료 배급은 각 지역에 설치된 재료 수송지점을 통한 해로, 혹은 수로에 의한 재료 배급을 기다려 각 구간의 공사를 차례차례 진척해나갔다. 그 공사 진행상황을 보면 1904년 3월 31일 용산~마포 구간의 노반공사에 첫 삽을 뜬 이래, 약 7개월이 경과한 10월 28일에는 이미 임진강변까지 건축되어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그 후 대동강 가교를 남기고 개성~평양 구간이 1905년 1월 14일에 준공되고, 같은 해 1월 26일에는 평양~신안주 구간이 준공되었다. 같은 해 2월 15일에는 임진강 교량이 완성되었으므로, 대동강의 도선 연락으로 3월 10일에는 용산~신안주 구간에 하루에 1회 왕복하는 지정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1905년 4월 3일 대동강 교량은 시운전에 성공함으로써 경성~신안주 구간이 완전히 연결되었는데, 나아가 북방 공구에 대해서는 4월 28일 대령~청천 양 강의 교량을 남기고 남북을 연결하여 용산~신의주 구간 선로의 준공을 알렸다. 그동안 임진강 및 대동강 교량은 공사 중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 극심한 추위와 싸우면서 작업을 추진한 것이다. 청천강~대령강 양 강의 교량은 1904년 10월 공사에 착수했는데, 당초 목표한 바와는 달리 결빙기에 일시적으로 작업이 중지됐다. 이듬해 3월 유수(流水)로 인해 기 완공된 부분이 파괴되어 그 설계를 변경하였고, 양 강 모두 상류로 우회시켜 약 7마일 반(12km)을 연장하였는데, 교량은 약 1,500피트(0.46km)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양 교량이 준공되어 1906년 4월 3일 여기에 경의군용철도의 간선 및 지선 합계 328마일(527.9km)이 완성되어, 모든 노선에 걸쳐 열차가 직통 연락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의철도 창설기념비의 건설 군용철도감부는 1906년 8월, 경성~평양 간 철도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평양역전 광장에 높이 35피트의 화강석 방추형의‘경의철도 창립기념비’를 세웠다. 비명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를 새겼으며, 비 주위에는 노획한 러시아 철도의 객차 부품을 이용하여 만든 철책을 설치했다. 경의철도 건설비용 군용 경의철도의 건설을 주로 하고, 긴 터널을 피하면서 교량 등도 가건축으로 하고, 측량 및 공사의 일부는 군용철도감부의 손에 의지했으므로, 노선의 길이가 긴 것에 비하면 의외로 저렴하게 부설할 수 있었다. 당초 예산으로는 합계 1,025만 엔이 잡혀 있었으며, 기타 공사에 할당된 공병대 비용과 직접 육군성으로부터의 재료비, 수송비 합계 약 960만 엔을 합산하면, 약 2,000만 엔 정도가 들어 1마일(1.6km)당 6만 1,000엔이 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공사의 진척은 용산~신의주 구간 328마일(약 530km)에 대해, 1904년 3월 31일 용산~마포 구간의 착공에서부터 1906년 4월 3일까지의 약 733일 동안 진행하였다. 그동안 1일 평균 약 730m 정도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특히 용산~신안주 구간은 실로 1일 평균 900m의 진척이었다. 마산선의 건설 러일전쟁의 전국이 확대하고, 특히 발틱 함대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만주 야전군과의 연락을 위해 일본 정부는 마산~삼랑진 구간 철도를 신속히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04년 8월 14일 마산포 철도 건설의 명령을 받은 철도감부는 철도 기사 이시카와 고쿠다이 외 4명을 인천에서 파견하였으며, 이어서 토지 가옥의 매수 외 인부 징집 등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공병 소좌 와타나베 겐지 및 1등 주계 구로누마 히코타로(黑沼彦太郞)를 파견하였으며, 마산포 철도 건축반을 편성했다. 건설을 위해 공병 중좌 도키오 젠자부로(時尾善三郞)를 비롯하여 31명은 9월 초순 부산에서 삼랑진을 거쳐 선로를 답사하면서 마산포에 도착하여 측량을 완료했다. 전 노선이 5공구로 분할되었고, 1공구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외주 용역으로 노반공사가 착수되었다. 이 철도는 낙동강 해안에서 경부철도로 연결되어 먼저 궤간 4척 8촌 반(143.5cm)의 궤도를 부설할 수 있는 노반을 건축했지만, 이에 18파운드 협궤 경편 궤도가 부설되었으며, 교량, 구교 및 복통은 가구조로서 최급 기울기를 40분의 1, 최소 곡선을 반경 20쇄로 하였다. 이 철도는 겨울이 오기 전에 준공할 예정으로 경부철도회사로부터 회송된 10마일(약 16km)분의 경편 궤도를 가지고 5마일(약 8km)의 부설 작업을 종료하였으며, 마산포에 육지 매립 및 다리도 완성했지만, 12월 15일 공사를 중지하라는 전령을 받게 된다. 같은 달 18일 본선을 4척 8촌 반으로 개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이에 필요한 궤도, 침목 등이 1주일 후 마산포에 도착했다. 곧바로 개축공사를 실시하기 위해 1905년 1월 22일에 마산포에서 궤도 부설이 착수되었으며, 낙동강변과 삼랑진 구간 약 2km의 선로가 4월 1일 이후 경부철도회사에 1년에 2,200엔 정도의 요금을 지불함으로써 사용이 가능해졌다. 공사 중 비로 인해 진영 부근에서 노반이 침하하여, 복구에 수십 일이 걸리는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극복했다. 5월 24일 궤도를 낙동강변으로 이끌어, 다음날 전체 길이 1,805척의 낙동강 가교량(목교)을 준공하여 시운전을 했으며, 5월 26일부터 마산포~삼랑진 간에 열차의 직통 운행을 개시했다. 그러나 가교공사 중 물에 씻긴 교량말뚝의 주위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6월 13일부터 보수공사에 착수하여 7월 하순 종료했다. 그러나 9월 4일의 홍수로 교량이 다시 파괴되었으며, 또한 전 선로에 수해를 입어 복구에 시일을 요했다. 어렵게 우기를 극복하고 완전 복구가 된 것은 10월 21일이며, 그동안 감부의 고통은 매우 심했으나, 곧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경원선 착공 1904년 6월 한국 주둔군 사령부는 임시철도대대 공병 중위 데라오 기로쿠(寺尾喜六)에게 경성~원산 간 도로를 정찰시켰으며, 같은 해 8월 말 다시 공병 소좌 와타나베 세이이치(渡誠一)를 파견하여, 도로 정찰과 아울러 철도부설을 정찰했다. 같은 해 9월 4일 경원선 부설 명령을 받은 임시군용철도감부는 원산에 와타나베 소좌를 반장으로 원산철도건축반을 두고, 원산~용지원 간 약 35km 구간의 공사 계획에 임하게 되었다. 와타나베 소좌는 같은 해 10월 서울에서 출발하여 외주 업자를 동반, 철도의 보수 구역을 분담하고 공사를 실시했으며, 또한 원산~용지원 간의 선로측량을 12월에 완공했다. 공사는 11월 10일 원산 부근에서 착수했지만 혹한기에 들어서면서 중지되었다. 다음해 다시 공사를 개시하여, 7월 하순 원산에서 약 16km의 노반공사 및 교량 가설을 완성했다. 경성~원산 간 철도 노반공사 및 도로 보수비용이 앞서 언급한 예산 20만 엔 한도를 초과하여 중지되었으며, 11월 12일에 사무소가 폐쇄되었다. 용산 방면에서는 용산건축반에 의해 1904년 11월 용산~의정부 간 약 31km의 측량을 완공했지만, 기점 부근에서 외국인 소유의 토지수용 교섭에 날짜를 소모하였고, 이어 혹한기를 맞이함으로써 토공의 착공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의정부~용지원 간은 당시 감부에 의해 여러 차례 거듭 지연되었지만, 1905년 2월 끝내는 측량반이 파견되었다. 이 측량반은 삼방관, 평강을 통과하는 선을 결정하였으며, 5월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8월 초 용산에서 기공했는데 11월 일시적으로 이를 중지, 다음해 4월 1일 다시 용산에서 약 6km의 구간에 공사를 실시하여 토공을 준공했다. 임시군용철도감부의 업적 1904년 3월 감부가 인천에 상륙한 후 1906년 통감부 인계에 이르기까지 이룩한 공사 개요를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1) 1906년 4월 3일 용산~신의주 간을 연결하여 열차 운행을 개시하고, 이어서 개량공사를 시행했다. (2) 1905년 10월 21일 마산선을 전체 개통하고, 계속하여 낙동강 교량을 옮기는 공사에 착수했다. (3) 경원선 용산 및 원산 양 방면으로부터 공사를 추진하여 그 일부를 착수했다. 이렇게 감부의 사업은 경의선 건설로 인해 그 대부분을 성취하였으며, 마산선 또한 공사를 마쳤다. 또한 경원선의 건설과 1905년 말부터 새로 기획된 압록강 교량의 공사를 남기고, 1906년 9월 1일 전부를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인계 후 8일 각 소속으로 복귀함으로써 그 중요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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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창시 | |
경부철도의 건설 | 2021.05.24 |
경부철도의 건설 궤간 및 궤도의 결정 경부철도의 궤간은 경부철도 합동계약에 따라 4피트 8인치 반의 표준 궤간을 적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회사 창립 계획이 진척됨에 따라 각 방면에서 각종 이설 및 논의가 생겨났다. 즉, 일본 내에서도 협궤식을 채용하고 있는 데 비하여 여객 화물이 희박한 조선에 광궤가 필요하지 않고, 또 경부철도의 자본은 2,500만 엔으로 협궤식 시설을 완성시키는 데에도 불충분한데 거액의 부설비 및 영업비를 필요로 하는 광궤식을 채용하는 것은 유리한 계책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철도작업국 측은 전적으로 궤간 1,000mm를 주장하였는데, 군부측은 일본 국유철도의 궤간 3피트 6인치(1,067mm)를 사용하면 일본 재래의 궤도와 차량 등은 그대로 조선에 전용하는 것이 가능하여, 장래 경의철도 및 만주철도의 완성 시기에는 건설비의 절약이 충분히 연락상의 불리를 보상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국의 철도는 궤간 4피트 8인치 반, 시베리아 철도는 5피트(1,524mm)를 이용하고 있었으므로, 장래 대륙 철도와 연락하여 세계 교통의 간선이 되는 사명을 가진 이 철도는‘단순한 식민지 철도로 볼 것이 아니라 널리 내다보아 표준궤간을 채용해야 한다.’는 것이 가사이 기사장의 의견이었다. 회사 내부에도 이견이 있었지만, 기사장의 열의가 결국 시부사와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부사와 회장은 비상한 결의와 영단으로 회사의 방침을 확립하고, 스스로 대외 교섭에 나서 육군 및 철도작업국 측과 수차례 절충을 거듭한 결과, 결국 양자의 승인을 얻어 표준 궤간 4피트 8인치 반과 75파운드(37kg) 궤도의 채용을 결정하였다. 훗날 조선철도 노선이 부산을 기점으로 하여 만주·중국·몽골 지역은 물론, 멀리 양쯔강 연안까지 차량을 직통 운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궤간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은 약간의 차이지만 나중에는 큰 차이가 생긴다는 말처럼, 당시 만약 3피트 6인치의 협궤로 철도를 건설했더라면 조선·만주·중국의 직통 운전은 말할 것도 없고, 시세의 추이에 따라 격증하는 수송량의 달성은 곤란했으며, 근본적으로 대규모의 개량 계획을 필요로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돌아보면 경부철도주식회사가 표준궤간을 결정 채용한 것은 후일의 조선철도를 위해 다행인 일이었다. 궤도는 먼저 일본제철소 제품을 사용했으나, 곧 미국 제품을 사용하였다. 속성기 전의 공사 예로부터 서울~부산 사이에는 3개의 도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서울에서 충주~안동~경주~울산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동로(東路), 두 번째는 동로의 충주에서 분기하여 문경~상주~대구~밀양을 지나는 중로(中路), 세 번째는 청주~영동~금산~성주~현풍을 거쳐, 창원에서 김해를 지나 부산에 이르는 서로(西路)였다. 경부철도의 선로는 먼저 고노 다카노부의 답사선이 있고, 후에 청일전쟁 중 센고쿠 박사 일행의 조사선이 있으며, 또 회사의 창립 전 예산의 대강 결정을 위해 오에 다쿠, 구노 기사 등의 예측선이 있었는데, 경부철도의 계획이 점점 구체화되면서 공학박사 가사이 아이지로(笠井愛次郞)를 기사장으로 하여 다수의 기술원과 함께 1900년 3월 선로 실측을 개시하였다. 이들 각 선은 서로의 전반과 중로의 후반을 잇는 선 또는 이에 근접하는 것으로, 회사는 각 선을 비교 고려한 결과, 예로부터 한반도의 보물 창고라고 불리는 충청·전라도의 경제적 지위를 중시하고, 또 서울~목포 간 및 서울~부산 간의 경쟁 철도의 출현을 적극적으로 피하려 하는 구노 기사 등의 예측선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가사이 기사장의 실측선(일부분이 개량된 현재선)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1901년 6월 성립된 회사는 자금 관계상 일시 착수 구간을 단축하였으나 양단으로부터의 기공이 유리하다고 보아 같은 해 8월 21일 영등포에서 북부 기공식을 거행하고, 같은 해 9월21일 초량에서 남부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용지 분란 철도용지는 경인철도의 경우와 같이 모두 한국 정부가 이를 제공하는 약정이었으므로 민유지는 일단 국가가 수용하기로 했으나, 일부 외국인이 관계된 토지는 상당히 귀찮아질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창립위원은 한국 정부에 의뢰하여 분란의 염려가 있는 남대문·부산·초량의 정거장 구역을 획정 표시하고 토지 매수를 금지하도록 주지시켰다. 그러나 1901년 공사 착수 직전이 되자 한국 관민의 태도는 지난해와 현저하게 달라졌다. 즉, 회사가 요구한 철도용지가 지나치게 넓으며 묘지·인가의 이전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같은 해 7월 남대문 부근에 거주하는 인민은 정거장을 용산으로 변경하도록 강하게 요구하였으며, 또 수원 부근의 묘지를 통과하는 도로 횡단 문제나 묘와 연결되는 지하도로 문제 등이 발생했다. 한편 정부 역시 철도용지에 대해서는 토지 수용법 발포가 필요하다고 보아, 그 조사를 실시할 때까지 용지 인도를 연기하는 등 형세가 용이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점차 회사 중역의 절충에 의해 이해를 얻어 원만히 진행되게 되었다. 회사는 공사의 진행과 동반하여 민유지의 용지 대금을 입체 지급하였는데, 이후 한국 정부와의 사이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각종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고, 이 밖에도 일반적으로도 생활 풍속의 차이, 엄동, 홍수, 양국 화폐제도의 차이 등으로 인하여 공사 시행상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공사는 북부에서는 1901년 9월 영등포~명학동(현재의 군포 부근) 간, 이듬해 7월 명학동~진위(현재의 오산~진위의 중간) 간, 1903년 5월 진위~부강 간의 각 구간을 기공하고, 남부에서는 1901년 10월 초량~구포 간, 이듬해 8월 구포~밀양 간, 1903년 4월 밀양~성현 간의 각 노선을 기공하였다. 이리하여 1903년 12월 28일까지 북부는 32마일(51.5km), 남부는 33마일(53.1km) 을개통하였다. 속성공사 러일의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 가운데 빠른 철도공사에 대한 명령이 떨어져, 초량에 임시건설부를 설치하고 속성 작업 전반을 총괄하게 하여 1904년 1월, 건설 사무를 공사, 재료 구매 및 재료 배급으로 나누어 공사장에 오야곤페이, 구매장에 아다치 다로, 배급장에 가사이 아이지로를 배치하여 각 담당을 관장시켰다. 일본에서도 구노 도모요시, 오카무라 하쓰노스케(岡村初之助), 그 외의 직원이 도착하여 있었으므로 구노 기사를 북부, 오카무라 기사를 남부의 각 공사 감독에 임명하고 종래의 진용을 일신하여 급히 부설에 착수하였다. 속성 명령 하달 당시의 공사 미착수 구간은 성현~부강 간 121마일(194.7km)이었는데, 공사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영동 정거장 북단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크게 나누고, 다시 이것을 10공구로 나누어 그 진척에 노력하였다. 공사 재료는 주로 일본 및 해외에서 구하였는데, 수송 선박의 부족과 재료 탑재선의 침몰, 또는 좌초의 재해를 당하였다. 육상 수송에 있어서는 도로 폭이 좁고 요철도 심하며, 교량도 없었기 때문에 차량을 사용할 수 없어, 재료 운반에 큰 곤란을 겪었다. 또 공사 시행에 있어 하천은 동절기 수개월간 결빙하고, 하절기에는 범람하는 등 공사 실시 기간이 매우 짧다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였으나, 재료 운반을 위해 북부는 금강, 남부는 낙동강의 선운을 이용하여, 또 상사문~왜관 간 경편 궤도를 부설하고, 성현 굴길에는 동구에서 서구에 이르는 길이 5km여, 밀양~유천 간 6km여의 가선을 설치하는 등 공사 미완성 구간의 전선을 토공하고, 궤도의 공사 기일을 서두르고, 굴길, 교량 등 개통이 쉽지 않은 곳에는 가선 또는 가교를 설치하여 건축열차운전에 힘쓰는 등 조금씩 공사의 지체를 면할 수 있었다. 공사는 큰 진척을 보였으나 우기에 예상 외의 수해가 생기고 더위가 심하여 병자가 속출할 것을 우려하였으나, 종사원의 노력에 의해 1904년 11월 10일 서울 기점 127.42마일(205.3km) 심천역 남방의 지점에서 남북 궤도의 연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공사 착수 이래 이 구간의 속성공사는 약 270일 만에 준공하였으므로 평균 그 진행 속도는 1일 1.6km였다. 회사는 전년 12월의 속성 명령에 근거하여 1904년 중에는 전선 개통 계획을 세웠으나, 전쟁 상황의 진전과 함께 본선 속성이 점점 급히 필요하게 되어, 정부는 회사에 대하여 그 개통 기일을 앞당기도록 명령을 내렸다. 회사는 1904년 3월 상신서를 제출하여 1904년 중에 이를 속성하는 것은 곤란하며 전쟁에 의한 물가, 임금의 등귀와 공사 재료 수송의 애로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 이상 준공기의 앞당김이 불가능했으므로 중간 70마일(112km)은 일시 24파운드 궤도의 협궤 가선으로 연결하면 같은 해 10월에는 개통이 가능하다는 뜻을 진언했다. 정부도 이 계획 변경을 인정하여 경편 철도 재료를 주문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전황 진전과 함께 황해의 제해권이 일본의 손으로 돌아와 군의 상륙지는 점차 북방으로 옮겨졌으므로, 협궤 속성의 필요도 없어지고 또 그 후 정세의 변화에 의해 1904년 중에 광궤로 개통이 가능하다는 오야 곤페이 공사장의 의견도 있어, 정부도 당초의 설계에 의해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회사가 주문한 경편 철도의 차량, 궤도 등이 계속하여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후 안봉철도 그 외의 군사 경편선에 이용되었다. 오우라 체신대신의 현지 시찰 1904년 9월 오우라 가네다케(大浦兼武) 체신대신은 부산에 상륙하여 초량을 출발, 속성공사의 실상을 자세히 시찰하면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많은 종사원이 밤낮을 노반공사 또는 궤도 부설 작업에 임하고 있는 사실과 특히 성현 부근의 반복선 시설에 대하여 크게 칭찬하였다. 대신은 성현 반복선의 조감도 및 사진 수 매를 찍어 돌아온 뒤 이를 메이지 천황에게 바쳐 감상하도록했다. 공사 진척 상황 1901년 기공 이래, 경부선은 5구간으로 나누어 공사에 착수, 1902년 10월이후 1905년 3월에 이르는 사이 순차 완성하여 각 공구간의 연락을 완결하였다. 초량~영등포 사이는 1905년 1월 1일부터 운수영업을 개시하고, 경인철도에 의한 영등포~서울 간을 고려하여 서울~부산 간의 연계를 완성하였다. 같은해(1905) 5월25일, 즉 동해해전의 2일 전 남대문 정거장 구내 광장(훗날의 古市町 철도국장 관사 부근)에서 성대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경부철도 개통식 이날 일본에서 후시미와카미야 히로야스왕(伏見若宮博恭王) 전하, 한국에서 의양궁 이재각 전하가 참석하고, 오우라 체신대신을 비롯하여 하세가와 육군 대장, 하야시 공사, 상·하 의원, 한국 각부 대신, 영국·미국·독일 등의 각국 공사, 영사 그 외 내외 귀빈 등 천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1894년 잠정합동조관의 체결로부터 십 수 년,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정부의 보호와 민간 유지가 헌신적인 노력과 당사자의 고심 경영 등이 결실을 맺으면서 경부철도 건설은 일단락되었다. 또한 조선-일본 교통의 연쇄로서 양국의 교의가 점점 친목을 더하게 되었고, 이 철도의 낙성은 조선철도사에 대서특필할 사실일 뿐만 아니라, 일본 국력의 발전에 한 신기원을 긋는 것이 되었다. 1905년 3월부터 남은 구간인 서울~영등포 사이의 복선 부설 및 부산~초량 사이의 건설공사에 착수하였는데, 마침 같은 해 우기에 수십 년만의 대규모의 폭풍우가 발생하여 연선의 하천이 범람하였다. 이로 인해 공사가 지체되고, 기존 선로와 교량 및 기타 공작물이 큰 손해를 입어 기본 공사만을 진행하였으나, 결국 통감부 통일 전에 준공하지 못했다. 부산~초량 구간은 1908년 4월에 개통하고, 영등포~남대문 구간은 1912년 9월 한강 제2교량이 준공된 후 복선운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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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창시 | |
경부철도주식회사 | 2021.05.17 |
경부철도주식회사 경부철도합동조약의 체결 조선정부는 신중히 고려한 결과, 철도부설에 필요한 토지를 조선에서 제공하고 자본 및 기술 등은 일본에서 부담하여 양국 협력을 통하여 대업을 달성하자는 취지 아래 1898년 9월 8일 경부철도합동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로써 다년간 염원이었던 본건은 우여곡절을 거쳐 일단락 맺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 조선 정부는‘한양~부산 간에 철도를 부설 사용하는 건 및 경과하는 곳의 하천에 축교하는 권리’를 경부철도회사 발기인에게 허가하고, 동 정부의 매수권을 유보함과 동시에 자본 및 기술 등은 일본 측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하고, 양국이 상호 협력하여 본 사업을 달성하려 하는 취지 아래 규정된 것이었다. 이 조약에서 조선 정부로부터 얻은 특전은 다음과 같다. (1) 선로, 정거장, 창고, 공작물 등에 필요한 용지는 조선 정부로부터 대가없이 빌린다. (2) 철도에 필요한 기계 및 각종 물건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의 관세 및 철도 용지에 관계된 세금을 면제하며 철도 영업에 관한 각종 이익에는 징세하지않는다. (3) 각 지방의 지선 건설은 조선 정부 및 조선 국민이 건설하지 않는 한 외국 국민에게 허가하지 않는다. 상기 계약 중에는 주주를 양국의 정부 및 국민으로 한정한 조항이 있었으므로, 창립위원들은 거액 자본의 일본 국내 모집이 곤란할 것임을 알고, 일본 정부도 또한 외자 수입을 유리한 계책이라고 생각하여 계약 수정의 절충을 거듭하였는데, 오에 다쿠는 프랑스가 기획한 수에즈 운하가 자본의 관계로 결국 영국의 점유로 돌아간 예를 들며 강경한 반대 의견을 제출하였다. 그 후 경부철도 보조 명령도 나와 외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계약 수정 문제는 자연 소멸되었다. 당시 일부의 의견에 따라 외국 자본을 충당했다면, 이어서 일어난 러일전쟁의 속성 및 그 후의 경영에 관하여 어떠한 곤란이 야기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창립준비 1898년 9월 경부철도합동조약이 성립되었으므로 다음해 1899년 2월 발기위원은 위원 오에 다쿠를 조선에 파견하고, 체신성 철도국 기사 구노 도모요시(久野知義), 참모본부 육군 중좌 오사와 가이유(大澤界雄), 그 외 기술원과 협력하여 현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오에 위원이 4월에 돌아와 7월에 답사 보고서, 선로도, 건설비 계산이 완성되었으므로, 발기인은 회사 창립의 방침을 정하고 자본금의 모집에 착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제계는 거액의 자본 모집이 곤란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대하여 투자하려 하는 자도 거의 없어, 회사의 설립은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특허 계약의 기공 기한 3년 반이 경과하였으므로, 발기인은 정부에 대하여 회사 설립에 관해 여러 차례 특별보호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계획으로 러일간국교를 해칠염려가 생겨 쉽게 진척되지 않았으므로, 위원들은 연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총리대신에게 청원함과 동시에, 같은 해 11월 제14회 제국의회 개회에 앞서 귀중양원(貴衆兩院) 의원에게 간청한 결과, 동 의회 의원 측에서 경부철도 속성에 관한 건설안을 제출하게 되어 다음해 1월 21일 양원의 대다수로 채택되었다. 이어 정부는‘외국에 철도를 부설하는 제국회사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하였는데, 이 또한 대다수로 양원을 통과하였다. 이것이 외국 철도의 경영에 관하여 의회가 협찬한 최초의 일이었다. 창립 준비 관계자는 의회의 협찬을 거쳐 잠시 근심을 덜었다. 그리고 1900년 2월 1일 발기인 총회를 열고 창립위원 13명을 선거하여 창립 사무 및 실지 측량을 실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회사에 대한 정부의 보호 정부는 1900년 3월 이래 사카타니 요시로(阪谷芳郞) 대장성 차관, 나카무라 유지로(中村雄次郞) 육군 차관 및 후루이치 고이(古市公威) 체신성 차관을 위원으로 하여 외국에 철도를 부설하는 제국회사에 관한 제도 및 경부철도 보호 조건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같은 해 9월 14일 법률 제87호로 먼저 의회의 협찬을 거친‘외국에 철도를 부설하는 제국회사에 관한 법률’의 공포가있었다. 그요지는다음과같다. 제국 국민으로 외국에 철도를 부설하고 운수업을 운영하기 위해 제국 내에 설립하는 회사에 대하여 칙령으로 특별 규정을 설치, 이것에 준거하도록 할 수 있음. 이 법률에 근거하여 칙령 제366호로 동일 특별 규정이 공포되어, 기술한 회사는 원칙으로서 상법 및 부속 법령의 지배를 받을 것을 정한 것 외 각종 특례를 인정받게 되었다. 창립위원이 9월 21일 새롭게 회사의 불입 주식자금 및 사채에 대한 보급 이자의 교부를 청원한 것에 대하여 정부는 발기인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에게 ‘경부철도주식회사 보조’명령서를 교부하였다. 이 명령서의 내용 중 주된 사항은다음과같다. (1) 그 회사의 자본 총액을 2,500만 엔으로 한다. (2) 설립 등기일로부터 기산하여 15년은 운수 개시 전에는 불입금에 대하여 1년 6푼의 이자를 교부하고, 운송 개시 후의 이익이 1년 6푼에 달하지 못했을 때에는 정부는 그의 부족을 보조한다. (3) 사채를 발행했을 때에는 그 불입 등기의 다음 달부터 그 회사가 사채에 대한 이자와 동일한 비율로 정부가 이자를 보조한다. 단지 그 보조액은 현재 사채의 액가에 대하여 연 6푼에 상당하는 금액을 한도로 한다. 이자 보조 기한은 사채 불입 등기일로부터 기산하여 15년으로 한다. (4) 정부가 이자를 보조해야 할 주식액 및 사채는 합하여 25만 엔을 한도로 한다. 경부철도회사의 성립 회사에 대한 보조 명령에 의해 기초가 확립되었으므로 1900년 10월 발기인 총회를 열고, 다음 가 정관을 결정하였다. (1) 자본금을 2,500만 엔으로 하고 최초 500만 엔에 해당되는 주식을 모집한다. (2) 주식은 1주 50엔으로 하고, 최초 10만 주를 모집하고 점차 증가시켜 50만 주로한다. (3) 주식의 불입은 1주에 대하여 5엔으로 한다. 창립 위원은 이 계획을 근거로 우선 발기인의 인수주를 정하였는데, 그 수는 3만 3,000주, 인원 190명이었다. 이어 일반 주주의 모집에 착수하여 위원은 도호쿠, 홋카이도, 주고쿠, 규슈 방면까지 가서 설득, 그 외 각 방면에서 찬동을 구하고, 국민의 국가적 관념에 하소연하여 전국의 주주를 모집하였다. 다음해 1901년 3월 제1회 주식 모집 마감결과 응모 총수 20만 9,000주로, 소요의 2배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정부의 본 철도 보조에 관한 1901년도 부가 예산은 3월 23일 의회를 통과하여 이자 보조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4월 30일을 기하여 제1회 불입을 실시하여 6월 도쿄 간다미토시로초(神田美土代町) 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당시 총 주 수는 10만 주, 주주 총 인원 5,900명이었다. 회사는 같은 달 29일 설립 등기를 완료하였다. 7월 2일 중역회에서 중역 회장에 시부사와 에이이치, 상무 중역에 오자키 사부로, 다케노우치 쓰나, 구사카 요시오(日下義雄)의 3명을 호선하여 1896년 이래의 현안이었던 경부철도는 일본 국민간의 힘에 의해 건설의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경부철도 속성령의 공포 경부철도주식회사는 1901년 9월, 북부 및 남부 양 방면에서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공사 진행 중인 1903년 11월 경인철도를 합병하여 그 영업을 계속하면서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 회사의 건설 자금은 당초 주식 불입금과 사채에 의해 계획하여 제1회 모집의 10만 주는 1주에 전후 2회 10엔 불입, 제2회 모집의 33만 5,000주는 1주에 5엔을 불입하였는데, 경제계의 상황에 비추어 거액의 사채 모집은 곤란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사채 원리 상환의 보증을 얻도록 청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부는 1903년 2월, 대강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렸다. (1) 채권 1,000만 엔에 한하여 이자 연 6푼 이내, 발행일로부터 10년 거치, 30년 이내에 수의 상환 조건으로 이를 발행하는 것을 인허한다. (2) 정부는 전 항의 채권에 대하여 회사의 철도 기타의 총 재산을 저당으로 하여 원리 상환 보증으로 한다. 이로 인해 회사는 같은 해 4월 말, 남은 주 6만 4,000주를 모집하였다. 그런 한편 제2회 모집 주식에 대하여 제2회 불입금 5엔을 징수하고, 이어 같은 해 8월 사채 400만 엔을 모집하고, 제3회 모집 주에 대해서도 불입하여 자금조달에 힘썼다. 1903년 가을, 동아시아의 정세가 점점 악화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외교·군사상 수송기관을 정비할 필요를 느끼고, 같은 해 10월 말 경부철도를 서둘러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2월 2일 지난 명령을 개정하여 1905년 중에 전 노선을 개통하기로 결정하고 감독을 더욱 엄격하게 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그러나 시국은 점점 긴박해져 이 철도의 전통은 먼저 예정된 기한을 기다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더 얼마간의 보조가 필요하다고 인정해, 의회의 소집을 기다릴 여유도 없었으므로 정부는 재정상의 필요 처분으로 긴급 칙령 발포를 청하고, 같은 달 28일 다음과 같이 칙령 제291호를 공포하였다. 제1조 군비 보충에 필요한 경비 지불을 위해 정부는 일시 차입금으로 특별 회계에 속하는 자금을 끌어다가 사용하고 또 국고 채권을 발행할 수 있다. 제2조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선로공사 속성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 편의를 주기위해 정부는 동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에 대하여 원리 지불을 보증할 수 있다. 전 항에 의해 보증해야 할 채권은 액면 1,000만 엔에 한하여 그이자는 1년 6푼 이하로 하고, 그 원금은 3년 거치 그 후 5년 이내에 변상하기로 한다. 제3조 경부철도주식회사가 공사를 속성하기 위해 특히 필요로 하는 비용의 보상으로 정부는 동 회사에 대하여 175만 엔을 보조할 수 있다. 단 어쩔 수 없는 사유에 의해 그 금액으로 본 항의 비용을 변상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때에는 145만 엔이내를 보조할 수 있다. 이 칙령을 근거로 정부는 같은 날 회사에 대하여 늦어도 1904년 12월 31일까지 경부선을 개통시킬 방침으로 공사의 빠른 계획을 세울 것 및 주금 불입액의 증가를 명하였다. 한편 같은 날 칙령 제292호로 경부철도주식회사 직제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총재 1명, 이사 7명 이내, 감사역 4명 이내를 두고, 총재 및 이사를 정부가 임명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업무 감독을 위해 경부철도주식회사 감리관제도를 두었다. 같은 날 공학박사 후루이치 고이를 총재로, 나카쇼지 렌(仲小路廉)과 가와사키 히로미(川崎寬美) 및 다케노우치쓰나 상무취제역을 상무이사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취제역 회장, 마에지마히소카 취제역 및 민영철을 이사로 명하고, 오에 다쿠와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오노 긴로쿠(小野金六) 및 나카야마 후미키(中山文樹)는 계속하여 감사역에 재임하였다. 회사는 명령에 따라 12월 28일 속성공사에 착수함과 동시에 공학박사 오야곤페이(大屋平)를 초빙하여 공사장으로 임명하고, 정밀한 설계 및 예산을 작성하였다. 사업비가 총 2,950만 엔에 달하여 자본금 2,500만 엔, 속성 보조금 175만 엔, 특별 보조금 45만 엔을 합하여도 230만 엔이 부족하였으며, 자금조달이 쉽지 않아 1904년 7월 그 보조금을 정부에 청원하였다. 정부에서도 심사 결과 그 부족함을 인정하였으나, 또 다시 보조금을 증액하기 어려운데다 증자하여 증가 주식을 정부가 인수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결국 8월 13일 회사에 대하여 일정 조건 아래 158만 엔을 무이자로 대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한반도 중요 종관선의 하나인 경부선의 건설은 점점 빠르게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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