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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철도와 도시의 발달 | 2024.09.20 |
2 | 철도의 개통 - 사설철도와 지역의 변화 | 2024.09.06 |
1 | 철도의 개통 - 근대 이전의 도시, 철도의 부설 | 2024.08.30 |
철도개통이후의 지역변화 | |
철도와 도시의 발달 | 2024.09.20 |
철도와 도시의 발달 우리나라에 철도가 부설되어 노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시가 발전하였다. 철도는 개항지와 내륙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노선의 특징은 도로와 비슷하게 종관형으로, 이는 지형과 도시 발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5년 경부선과 경의선, 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이 완공되면서 조선 시대에 발달하였던 도시와 다른 새로운 도시들이 철도 부설과 함께 성장하였고, 기존의 도시보다 신흥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서울과 부산의 이동시간이 14일에서 14시간으로 단축되어 시간과 공간의 지도가 바뀌게 되었다. 철도와 도청소재지의 이전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1910년에는 경기도 도청소재지를 수원에서 경성부로, 1920년에는 함경북도 도청소재지를 원산에서 나남(청진)으로, 1923년에는 평안북도 도청소재지를 의주에서 신의주로, 1925년에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를 진주에서 부산으로 각각 이전하였다. 모두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대구와 공주, 상주, 의주, 전주, 광주, 함흥이 발달하였는데, 철도 개통 이후 각각 부산과 대전, 김천, 신의주, 익산, 군산, 목포, 원산 등의 도시가 발전하게 되었다. [표 17] 신흥철도 도시(부)의 인구변화(단위 : 명) * 자료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참조 당시 부는 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흥도시 인구 증가는 신의주가 가장 많이 증가한 19.3배를 제외하면 거의 5배~8배로 1920년과 1944년을 비교해 볼 경우도 부(시)의 전체적인 인구 증가율은 5.7배에 달해 비슷한 증가율을 보인다. [그림 6] 철도 부설로 탄생한 신흥도시의 인구변화 당시의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1920년과 1944년을 비교해 볼 때 전체인구는 1.5배 증가하여 당시 도시부에 해당하는 곳이 더 많이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철도와 연결된 지정면 / 읍에 해당하였던 곳을 보면 [표 18]과 같이 김천의 경우도 1920년에 비해 1940년에 3.4배나 인구가 증가하였다. [표 18] 신흥철도 지정면 / 읍의 인구변화(단위 : 명) * 자료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참조 철도망으로부터 소외되어 발전이 멈춘 대표적인 예의 하나는 경상북도 상주이다. 1928년 통계를 보면 상주 인구는 24,000명, 김천이 13,000명, 안동이 10,000명, 문경이 2,000명, 예천이 5,000명으로 상주는 그 지역의 중심이었다. 상주는 쌀 생산과 양잠으로 유명하였고, 예로부터 상주 명주는 전국적으로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상주는 철도 경부선이 김천을 경유함에 따라 해방 이후 계속해서 발전에서 소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김천에서 영주까지 연결되는 경북선상에서 위치하고 있는데, 2004년의 인구는 상주가 11만 명, 김천 인구는 14만 명이었다. 철도가 발전한 지역은 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역 주변에 정주하면서 관공서와 학교, 상업 기능 등이 집적되었고, 인구가 증가하고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철도가 만든 신흥도시를 보면 대부분 철도역 주변에 경찰서, 우체국, 행정기관, 학교, 시장, 상점 등이 들어서면서 지역이 크게 변화하였다. 다음의 [표 19]를 보면 철도 개통으로 소비가 촉진되었고, 사업과 각종 영업이 발전하여 인구 증가와 지역의 발전, 관광객 증가 등으로 이어졌다. [표 19] 철도 개통과 도시의 발전 * 자료 : 鐵道院(1917), 《鐵道の社會及び經濟に及ぼせる影響》를 참조하여 정리 [그림 7] 일본의 신칸센 개통과 쇠퇴한 도시(X는 쇠퇴한 도시) (일본 波床正敏 교수 제공, 오사카산업대학) 한편 일본의 경우도 재미있는 분석이 있다. 고속철도인 신칸센이 개통되면서 이 노선에서 벗어난 도시들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료를 보면 쇠퇴한 도시로는 하코다테, 도야마, 가나자와, 와카야마, 도쿠시마, 구마모토, 가고시마가 그러한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들은 메이지 시대에 인구가 전국 15위 내에 포함되었지만, 지금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신칸센 운행 여부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표 20] 철도 개통 전후와 철도역 부근 발전 [표 21] 철도 개통과 인구의 변화(단위 :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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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후의 지역변화 | |
철도의 개통 - 사설철도와 지역의 변화 | 2024.09.06 |
철도의 개통 3) 사설철도와 지역의 변화 사설철도 운영에 따른 지역의 변화를 당시 기록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참고 6) (1) 금강산전기철도 금강산전기철도(주)는 경원선 철원역을 기점으로 강원도 회양군 안풍면 화천리까지 길이 101.4km, 궤간 1.435m의 전기철도 부설 허가를 1919년 8월 12일에 얻었다. 이 회사는 조선에서 수력전기로 전기사업을 하고, 그 전력을 동력으로 하여 철도사업을 경영하며, 남는 전력을 가지고 지방의 전등 전력사업도 운영하였다. 또한 경성전기(주)에 전기를 팔았다. 나아가 철도사업으로 세계적인 명산인 금강산 관광에 기여하였다. (2) 조선경남철도 조선경남철도(주)는 경부선 천안역을 기점으로 충청남도 서부 해안을 끼고 남하하여 전라북도 군산(群山) 대안(對岸)까지 그리고 천안에서 북상하여 안성까지 158.8km, 궤간 1.435m의 증기철도 부설을 신청하여 1919년 9월 30일 허가를 받았다. 이 철도는 충청남도 및 경기도 남부, 강원도 중앙부를 횡단하여 동해로 통하는 일대 교통로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허가선 연선(沿線)은 기름진 들판을 이루는 광대한 농지와 굴곡이 많은 장대한 해안선을 끼고 해륙산업의 개발과 경제 지역과의 교류 발전 촉진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3) 신흥철도 신흥철도(주)는 1931년 4월 30일 국철 함경선 함흥에서 서호리까지 연장 18.5km, 궤간 0.762m의 증기·전기철도의 부설 면허를 얻었다. 함흥~서호진 구간에는 과거 함흥탄광철도(주)가 1913년 9월 29일 부설 허가를 얻어 1915년 12월 20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는데, 국철 함경선의 부설로 같은 구간을 병행한다는 이유로 국가가 매수하여 1922년 12월 1일부터 폐지되었다. 그 후 서호진 지역이 조선 질소비료 등의 공장지대로 발전하여 함흥시가와 화물, 여객의 교류가 왕성해져 다시 사설철도가 출현하였다. 회사는 이미 부설된 함남 송흥에서 도안까지의 구간 28.5km의 부설 면허를 9월 15일 얻었다. 이 구간의 부전령(赴戰嶺)이라는 준험한 곳을 넘는데, 700m나 되는 해발고도 차이(標高差)로 인해 조선에서는 최초의 강삭철도(鋼索鐵道, 인클라인) 7.1km가 운행되었고, 동력으로 전기를 추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4) 다사도철도 1935년 다사도(多獅島)철도(주)는 1월 21일 국철 경의선의 종단 신의주에서 평안북도 다사도까지의 39.3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신의주와 건너편인 만주 측 안동은 모두 압록강 유벌(流筏, 베어낸 나무를 강물로 띄워 보냄)의 집산지로, 황해로 통하는 배로 연결되는(舟運) 교통으로 번영해 왔다. 그런데 약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의 겨울 동안은 압록강의 동결로 인해 이러한 경제활동이 모두 정지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류 30km 정도 되는 다사도 부근은 혹한일 때도 얼지 않으므로, 이것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1년 동안 경제활동이 가능해진다. 이것에 착안하여 철도 부설을 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사도의 항구 건설도 진행되어 양쪽 계획이 진척되어 나갔다. 이어 같은 회사는 12월 10일 같은 철도의 양시(楊市)에서 분기하여 국철 경의선 남시(南市)까지 18km 지선의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것으로 다사도철도는 경의선 양쪽으로 접속하게 되어 경의선의 복선적인 기능도 하게 되었다. (5) 조선경동철도 조선경동철도(주)는 7월 5일 기존 부설된 여주에서 경기도 점동면까지 16km 노선에 이어 9월 23일 국철 경부선 수원에서 인천항까지 54km, 궤간 0.762m의 증·가솔린 철도의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인천항과 수원을 연결하고 나아가 이미 부설된 노선을 통해 오지와의 중요한 교통로를 형성하는 것이 되었다. 조선철도(주)는 10월 10일 황해선 기존 면허 노선의 도중인 취야에서 옹진까지 구간 25.2k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6) 삼척철도 삼척철도(주)는 1936년 3월 2일 강원도 동해안 정라(汀羅)에서 도계(道溪)까지의 35.7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삼척지구의 무연탄 지하자원 개발을 주목적으로 하며 그 수송기관으로서 계획된 것이다. 이 무연 탄광은 지리적으로 교통이 불편한 강원도 오지에 있으며, 지역적으로도 불리한 조건이 많았으므로 개발이 늦어져 있었다. 일본전력회사는 발전 연료의 확보를 위해 삼척 탄광에 관심을 가지고, 소유자인 조선무연탄회사로부터 권리를 받아 개발에 착수, 삼척개발회사가 창립되어 채광을 시작하였다. 무연탄을 일본으로 출하하는 항구로 처음 정라를 기점으로 하여 철도 면허를 얻었지만, 다음 해 3월 25일 이것을 묵호(墨湖)로 변경하여 철도 연장도 6km 늘어나 전체 41.7km가 되었다. (7) 경춘철도 경춘철도(주)는 1936년 7월 13일 경성부(京城府) 청량리에서 강원도 춘천까지의 구간 92.2km, 궤간 1.435m, 증기·경유(輕油)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춘천은 강원도 거의 중앙에 있는 도청소재지 및 주요 지방 도시로, 철도 부설 요청이 이전부터 있었다. 1920년에 경춘전기철도(주)가 경성~춘천 간에 면허를 얻었지만, 오랫동안 공사에 착수하지 못해 그만 1926년에 면허의 효력을 잃었다가 다시 부설 면허를 얻게 되었다. 춘천이 경성과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철도의 혜택을 입지 못한 것은, 연선(沿線)의 농림산업 이외에는 두드러지는 산업 없이 춘천 이외에 특별한 도읍도 없었던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산업개발이 진행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져 경성과 춘천의 관민(官民) 사이에서 철도 부설에 대한 의지가 생김에 따라 자본금 1천만 엔의 철도회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면허는 처음 경성 교외의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92.2km였는데, 1937년 6월 15일 사업계획서의 변경으로 기점을 경성부의 제기정(祭基町)으로 옮겨, 선로 연장이 95.6km가 되었다. 그러나 공사 시행으로 결국 93.5km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수많은 사설철도 대부분이 일본 자본가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이 철도는 다음에 언급할 조선평안철도와 함께 조선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조선 내 자본에 의해 부설된 사설철도라고 할 수 있다. (8) 조선평안철도 조선평안철도(주)는 1936년 9월 7일 국철 평남선 진남포에서 평안남도 귀성(貴城)면 용강온천까지의 구간 35.7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연선 주변으로 광량만(廣梁灣)의 큰 제염(製鹽)장으로 산출하는 소금 수송을 주요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며, 더불어 연선 주변 농산물의 수송 및 용강온천 여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9) 단풍철도 단풍(端農)철도(주)는 1936년 12월 26일 국철 함경선 단천(端川)에서 함경남도 천남면 홍군리까지의 구간 74.5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함경남도 동북부 오지의 전원(電源)개발이 주요 목적으로, 장진강 수력전기회사의 언제(堰堤, 댐) 공사로 사용할 자재 수송을 위해 계획된 것인데 연선 지방 개발보다는 오지의 삼림자원 개발에 공헌하였다. ======================================= 참고 6)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pp.897~808, pp.864~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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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후의 지역변화 | |
철도의 개통 - 근대 이전의 도시, 철도의 부설 | 2024.08.30 |
철도의 개통 1) 근대 이전의 도시 상업이 발달하고 시전과 사상도고가 발전하여 상인들의 세력이 컸던 고을은 한성과 개성, 평양, 전주, 상주, 대구, 충주, 의주 등의 지방 도시의 인구가 1만~3만 명까지였다. 외국무역이 이루어졌던 서울과 부산, 의주, 회령, 경성 그리고 큰 장시가 열렸던 대구와 평양, 안성, 공주, 강경, 원산, 연일은 모두 대도시이거나 인구 2,500명 이상의 도시에 속하였다. 이들 도시는 전통적인 도시로 철도 개통 이후 상대적으로 쇠퇴한 도시 등이 많이 있다.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의 도시 등이 그러한데 경부선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철도가 이들 도시를 직접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 14] 근대도시의 변화 2) 철도의 부설 근대에 들어오면서 경부선과 경의선 그리고 호남선과 경원선 철도가 부설되었다. 철도 노선은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중에서도 전쟁을 위해 빠르게 건설이 가능한 지역이 선택되기도 하였다. 이미 발달한 지역의 경우 철도건설에 대한 반대 등도 있어 새로운 지역을 통과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새롭게 발전한 도시는 경부선의 경우 부산과 대전, 김천, 천안, 경의선의 경우는 신의주, 호남선은 익산과 군산, 목포, 경의선의 경우는 원산 등이다. 철도 노선과 관련하여 통과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의 발전은 크게 달라졌다. 안성의 경우 조선 시대까지 크게 발전한 지역이었으나 경부선 철도에서 벗어나는 지역으로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 경부철도 노선답사도. [인천일보] 2021년 3월 30일 예부터 서울~부산 사이에는 세 개의 도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서울에서 충주~안동~경주~울산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동로(東路), 두 번째는 동로의 충주에서 분기하여 문경~상주~대구~밀양을 지나는 중로(中路), 세 번째는 청주~영동~금산~성주~현풍을 거쳐 창원에서 김해를 지나 부산에 이르는 서로(西路)였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중로는 조선 시대 4로(四路)로, 한양~판교~용인~양지(陽智; 현 용인시 양지면)~광암~달내(達川;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충주로 흘러 남한강에 합수, 3대 명수의 하나)~충주~조령~문경~유곡역(幽谷驛; 문경시 남쪽에 있음)~낙원역~낙동진(洛東鎭; 현 상주시 낙동면)~대구~청도~밀양~황산역을 거쳐 동래, 부산에 이르는 길이다. 서로에 해당하는 5로는, 한양~유곡역은 4로와 같고, 유곡역~상주~성주~현풍~칠원~함안~진해~고성을 지나 통영으로 통한다. 당시의 기록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참고 4) 1903년 가을, 동아시아의 정세가 점점 악화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외교·군사상 수송기관을 정비할 필요를 느끼고, 같은 해 10월 말 경부철도를 서둘러 건설하기로 했다. 12월 2일 지난 명령을 개정하여 1905년 중에 전 노선을 개통하기로 하고 감독을 더욱 엄격하게 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그러나 시국은 점점 긴박해져 이 철도의 전통은 먼저 예정된 기한을 기다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더 얼마간의 보조가 필요하다고 인정해 의회의 소집을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재정상의 필요 처분으로 긴급 칙령의 발포를 청하고, 같은 달 28일 다음과 같이 칙령 제291호가 공포되었다. 철도망의 건설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부설된 것이다. 경부철도의 선로는 먼저 고노 다카노부의 답사선이 있고, 후에 청일전쟁 중 센고쿠 일행의 조사선이 있으며, 또 회사의 창립 전 예산의 대략적인 결정을 위해 오에 다쿠, 구노 기사 등의 예측선이 있었는데, 경부철도의 계획이 점점 구체화하면서 가사이 아이지로(笠井愛次郞)를 기사장으로 하여 다수의 기술원과 함께 1900년 3월 선로의 실측을 개시하였다. 이들 각 선은 서로의 전반과 중로의 후반을 잇는 선 또는 이에 근접하는 것으로, 회사는 각 선을 비교 고려한 결과 예로부터 한반도의 보물 창고라고 불리는 충청·전라도의 경제적 지위를 중시하고, 또 서울~목포 간 및 서울~부산 간의 경쟁 철도의 출현을 적극적으로 피하려 하는 구노 기사 등의 예측 선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가사이 기사장의 실측 선(일부분이 개량된 현재 노선)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1901년 6월 성립된 회사는 자금 관계상 일시 착수 구간을 단축하였으나 양단으로부터의 기공이 유리하다고 보아 같은 해 8월 21일 영등포에서 북부의 기공식을 거행하고, 같은 해 9월 21일 초량에서 남부의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러일전쟁을 앞뒀는데 여러 산맥을 뚫어야 하는 등 여건상 복합적인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북부선은 전의~회덕~영동 통과 노선이 됐고, 남부선에선 대구~청도~밀양~삼랑진~초량~부산진 등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안성, 진천, 청주 등 예전의 번성한 지역 등이 배제되었다. 러일전쟁 직전에 진행된 제5차 답사에선 전쟁의 병참로를 위해 부산~서울~만주의 열차 운행시간을 최대한 단축했다. 또 공사비 절약을 위해 북부에서 전의~영동~회덕을 잇는 직행 선은 오늘날 경부철도와 거의 일치한다. 경부철도의 궤간은 경부철도 합동 계약에 따라 표준궤간(1,435mm)을 적용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각 방면에서 각종 이설 및 논의가 생겨났다. 당시의 기록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참고 5) 일본 내에서도 협궤식을 채용하고 있는 데 비하여 여객 화물 수송량이 적은 조선에 광궤의 필요가 없고, 또 경부철도의 자본은 2,500만 엔으로 협궤식 시설을 완성시키는 데도 불충분한데 거액의 부설비 및 영업비를 필요로 하는 표준궤를 채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도 있었다. 철도작업국 측은 전적으로 궤간 1,000mm를 주장하였는데, 군부 측은 일본국유철도의 궤간 3피트 6인치(1,067mm)를 사용하면 일본 재래의 궤도, 차량 등은 그대로 조선에 전용하는 것이 가능하여, 장래 경의철도 및 만주철도의 완성 시기에는 건설비의 절약이 연락상의 불리함을 충분히 보상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국의 철도는 궤간 4피트 8인치 반, 시베리아 철도는 5피트(1,524mm)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장래 대륙철도와 연락하여 교통의 간선이 되는 사명을 가진 이 철도는 단순한 식민지 철도로 볼 것이 아니라 널리 내다보아 표준궤간을 채용해야 한다.”라는 것이 일본 측 가사이 기사장의 주장이었다. 회사 내부에도 다른 의견이 있었지만, 기사장의 의견에 결국 시부사와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부사와 회장은 회사의 방침을 확립하고, 육군 및 철도작업국 측과 수차례 절충을 거듭한 결과, 결국 승인을 얻어 표준궤간 4피트 8인치 반과 75파운드(34kg) 궤도의 채용을 결정하였다. 조선철도 노선이 부산을 기점으로 하여 만주와 중국, 몽골 지역은 물론, 멀리 양자강 연안까지 차량 직통 운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궤간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궤도는 먼저 일본제철소 제품을 사용했으나, 곧 미국 제품을 사용하였다 ▲ 미국 그래나이트철도(1854년 건설, 자료 : 위키피디아) 노선 부설에 있어 고려된 것은 수운, 항만과의 연결이었다. 우리나라의 서울과 인천, 일본의 도쿄와 요코하마, 상해, 타이완, 영국 등의 최초의 철도 노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의 해양 무역 도시 리버풀은 역사와 상업으로 유명한 항구였다. 리버풀은 대영제국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미국으로 이주하는 북유럽인과 노예 등 인구의 대량 이동을 위한 주요 항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근대 하역 기술과 수송 체계, 항만 관리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항구를 생산도시인 맨체스터와 철도로 연결한 것이다. 타이완의 경우에도 타이페이에서 항구인 기륭이 가장 먼저 개통되었다. 미국의 그래나이트철도(Granite Railway, 3.2km 운행 거리)도 화강암 수송으로 유명한데 철도와 수운으로 수송하였다. 이는 당시 항구가 무역과 군사의 중심이었고 이를 내륙까지 연결하는 교통수단이 철도였다. 철도운영자는 버스와 배를 함께 운영하여 연계 수송이 자연스러웠고, 국제수송도 담당하였다. 철도 노선은 1927년 이후 조선철도 12년 계획에 의해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1925년~1937년은 산업선의 확충, 1937년~1945년에는 수송력 증강을 위해 복선화, 자동신호 등이 설치되었다. [표 15]를 보면 확인할 수 있듯이 1927년 시작된 조선철도 12년 계획으로 경전선과 도문선, 혜산선, 만포선, 동해선 등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조선철도는 1920년 말부터 확장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조선철도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표 15] 일제강점기 철도 노선별 건설현황(국유철도) * 자료 : 조선총독부 철도국(1940), 《조선철도 40년 약사》, pp.231~326 [표 16] 일제강점기 사설철도의 상황(1944년도 말 현재) * 자료 :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pp.877~883 ▲ [그림 5] 철도 노선도(1945년 현재, 빨간 선은 사설철도, 《조선교통사》 참조) ======================================= 참고 4)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pp.39~40 참고 5)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p.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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